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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북한의 직할시 평양시 平壤市 Pyongyang City | |||
행정 | 국가 | ||
시 소재지 | 중구역 중성동 | ||
행정구역 | 19구역 2군 1동 | ||
면적 | 1,849㎢ | ||
인문 | 인구 | 2,999,466명 | |
인구 밀도 | 1,622명/㎢ | ||
정치 | 당 위원회 책임 비서 | 조선로동당 김수길 | |
인민위원장 | 조선로동당 최희태 | ||
지역번호 | 02, 0195 | ||
ISO 3166-2 | KP-01 |
1. 개요[편집]
평양시는 북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2. 상세[편집]
도시의 중심으로 대동강이 흐르며, 넓은 충적 평야가 발달하였다. 고려 때는 서경이라고 불렸다. 북한에서는 별칭으로 '혁명의 수도'라고 부르며, 소련의 건물 양식과 유사한 건물들이 지어졌다. 한국 전쟁 때 대한민국 국군이 잠시 점령한 적이 있다. 1967년부터는 인구 증가로 인해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여, 다양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평양은 평양 준평원에 위치해 있다. 북쪽, 동쪽과 서북쪽은 평안남도에, 서남쪽은 남포시에, 남쪽은 황해북도에 접한다.
평양에는 대동강이 흐르는데, 강 좌측에 형성된 중심부를 본평양(本平壤), 서쪽을 서평양 그리고 강을 건너 동쪽에 형성된 시가지를 동평양으로 나누기도 한다. 평양시의 중심은 중구역이며, 1950년대 이래 내각청사, 인민대학습당, 조선미술박물관, 평양학생소년궁전을 비롯한 특색있는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창광거리, 영광거리, 광복거리, 창전거리, 미래과학자거리, 려명거리, 통일거리 등이다. 인민대학습당 앞에는 김일성광장이, 부근에는 주체사상탑이 있는데 평양의 상징이 되고 있다.
공민등록법의 규정에 따라 '17세 이상의 북한 인민'은 공민증을 발급받지만, 평양시민은 1997년부터 특별히 '평양시민증'을 발급받아 다른 지역 주민과 차별을 두고 있다.
평양은 평양 준평원에 위치해 있다. 북쪽, 동쪽과 서북쪽은 평안남도에, 서남쪽은 남포시에, 남쪽은 황해북도에 접한다.
평양에는 대동강이 흐르는데, 강 좌측에 형성된 중심부를 본평양(本平壤), 서쪽을 서평양 그리고 강을 건너 동쪽에 형성된 시가지를 동평양으로 나누기도 한다. 평양시의 중심은 중구역이며, 1950년대 이래 내각청사, 인민대학습당, 조선미술박물관, 평양학생소년궁전을 비롯한 특색있는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창광거리, 영광거리, 광복거리, 창전거리, 미래과학자거리, 려명거리, 통일거리 등이다. 인민대학습당 앞에는 김일성광장이, 부근에는 주체사상탑이 있는데 평양의 상징이 되고 있다.
공민등록법의 규정에 따라 '17세 이상의 북한 인민'은 공민증을 발급받지만, 평양시민은 1997년부터 특별히 '평양시민증'을 발급받아 다른 지역 주민과 차별을 두고 있다.
3. 역사[편집]
광복 후 38선 이북은 소련군정이 들어섰다. 1948년에 소련군이 철수하였다. 1946년 9월에는 북부 지역의 실질적인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평양부는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중구역, 동구역, 서구역, 남구역, 북구역의 5개 구역을 포함하는 특별시로 승격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1950년 10월 1일에 38선을 넘자 10월 9일 김일성의 부대와 정부, 조선노동당 등 주요 기관이 평양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1950년 9월 28일에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은 수뇌부와 주요 기관, 단체, 부대 등을 평양에서 후퇴시킬 준비를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38선을 넘자 10월 9일부터 본격적인 평양 후퇴작전이 전개되었고,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평양에서 후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10월 24일 온정리 전투를 시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를 시작한 중국인민지원군은 11월 26일부터 본격적 공격을 개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2월 6일에 평양으로 재입성하였다. 남한의 국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2년 행정 구역 체계를 기존의 4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하면서 직할시로 변경되었고, 1956년에 만경대구역과 서성구역을 신설하였으며, 1967년부터[출처 필요] 본평양(本平壤), 서평양(西平壤), 동평양(東平壤)으로 나누고, 1972년에는 임시수도가 아닌 공식 수도가 되었다. 2006년 19개 구역 4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평양은 한국 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공공건물과 공장건물들이 많이 파괴되었으며, 보통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버려서 도시의 원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 전쟁 이후 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 가공공업의 발달로 동평양과 평양시 중구역에 5층 내지 15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며, 천리마거리와 창광거리, 평양역 앞 역전거리를 비롯한 큰 도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평양에 속했던 중화군, 상원군, 승호구역과 강남군이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다가, 이듬해인 2011년 이 중 강남군만 평양시로 재편입되었다.
구 향산군 묘향산에서 모란봉구역에 편입되었다. 2018년 2월 10일 구 구성시 방현동이 평양에 편입되었다.
평양은 도농통합형 도시를 추구하고 있으며, 평양 전체의 토지 중 시가지 면적은 20% 이하이고, 농지 면적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농산물의 자급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1950년 10월 1일에 38선을 넘자 10월 9일 김일성의 부대와 정부, 조선노동당 등 주요 기관이 평양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1950년 9월 28일에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은 수뇌부와 주요 기관, 단체, 부대 등을 평양에서 후퇴시킬 준비를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38선을 넘자 10월 9일부터 본격적인 평양 후퇴작전이 전개되었고,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평양에서 후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10월 24일 온정리 전투를 시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를 시작한 중국인민지원군은 11월 26일부터 본격적 공격을 개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2월 6일에 평양으로 재입성하였다. 남한의 국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2년 행정 구역 체계를 기존의 4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하면서 직할시로 변경되었고, 1956년에 만경대구역과 서성구역을 신설하였으며, 1967년부터[출처 필요] 본평양(本平壤), 서평양(西平壤), 동평양(東平壤)으로 나누고, 1972년에는 임시수도가 아닌 공식 수도가 되었다. 2006년 19개 구역 4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평양은 한국 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공공건물과 공장건물들이 많이 파괴되었으며, 보통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버려서 도시의 원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 전쟁 이후 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 가공공업의 발달로 동평양과 평양시 중구역에 5층 내지 15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며, 천리마거리와 창광거리, 평양역 앞 역전거리를 비롯한 큰 도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평양에 속했던 중화군, 상원군, 승호구역과 강남군이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다가, 이듬해인 2011년 이 중 강남군만 평양시로 재편입되었다.
구 향산군 묘향산에서 모란봉구역에 편입되었다. 2018년 2월 10일 구 구성시 방현동이 평양에 편입되었다.
평양은 도농통합형 도시를 추구하고 있으며, 평양 전체의 토지 중 시가지 면적은 20% 이하이고, 농지 면적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농산물의 자급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4. 지형[편집]
평양은 낮은 구릉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평야가 많아 농업이 발달했다. 주요 산은 만경대구역에 있는 룡악산, 중구역에 있는 창광산, 대동강구역의 문수봉이 있다. 대부분 산은 휴양지나 유원지로 만들어졌다.
중심지에 위치한 산은 모란봉(95m)이고, 그 동쪽 주변에 대성산(270m)이 있고, 그 북쪽으로 청운산(373m)과 용골산(400m)이 있다. 모란봉의 동쪽의 비교적 높은 산지가 시작하는 초입에는 제령산(498m)이 서 있다.
평양은 여름이 되면 홍수가 발생하여 농업이 어려웠으나, 김일성이 직접 지시하여 보통강의 관개공사를 실시함으로써, 홍수 피해가 적어지고,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보통강을 옥토,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게 하였다고 선전하며, 보통강구역에 기념탑이 건설되었다. 보통강 근처에는 보통강유원지가 있어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중심지에 위치한 산은 모란봉(95m)이고, 그 동쪽 주변에 대성산(270m)이 있고, 그 북쪽으로 청운산(373m)과 용골산(400m)이 있다. 모란봉의 동쪽의 비교적 높은 산지가 시작하는 초입에는 제령산(498m)이 서 있다.
평양은 여름이 되면 홍수가 발생하여 농업이 어려웠으나, 김일성이 직접 지시하여 보통강의 관개공사를 실시함으로써, 홍수 피해가 적어지고,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보통강을 옥토,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게 하였다고 선전하며, 보통강구역에 기념탑이 건설되었다. 보통강 근처에는 보통강유원지가 있어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5. 기후[편집]
평양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wa)에 속하며, 겨울에는 날씨가 매우 춥다. 연평균 강수량 936.4mm로 한반도에서는 소우 지역에 속하며, 강수의 70% 이상이 여름철에 집중되어 내린다.
6. 산업[편집]
평양 일대는 일제 강점기 무렵부터 이른바 서선공업지대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평양시는 정권 수립 후 3.26전선공장과 대동강맥주공장을 비롯해, 선교구역편직물공장, 평양방직공장, 평양기계공업공장 등의 여러 공장들과 평양주택사업소와 백두산건설사업소 등의 주택, 건축기업소가 세워졌다. 이 곳은 지금도 북한의 공업 중심지로 사리원시와 송림시를 합쳐 평양공업지구라고 부른다.
발전소는 평양화력발전소와 동평양발전소가 있다. 이 발전소에서 나오는 폐열과 온수로 평양 전역에 있는 가정의 난방을 공급한다. 제철소는 송림제철소가 있다. 송림제철소는 청진시의 김책제철소 다음가는 대규모 제철소이다.
3.26전선공장은 평양시 평천구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대적인 설비와 제품의 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3.26전선공장은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받았다.
기타 평양의 공장으로는 평양룡성담배공장, 대동강 맥주, 대동강텔레비전수상기공장, 평양화장품공장, 평양선교방직공장, 평양아동식료품공장, 교육도서인쇄공장, 평양종합인쇄공장, 평양자전거공장, 평양기계공업공장 등이 있다.
발전소는 평양화력발전소와 동평양발전소가 있다. 이 발전소에서 나오는 폐열과 온수로 평양 전역에 있는 가정의 난방을 공급한다. 제철소는 송림제철소가 있다. 송림제철소는 청진시의 김책제철소 다음가는 대규모 제철소이다.
3.26전선공장은 평양시 평천구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대적인 설비와 제품의 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3.26전선공장은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받았다.
기타 평양의 공장으로는 평양룡성담배공장, 대동강 맥주, 대동강텔레비전수상기공장, 평양화장품공장, 평양선교방직공장, 평양아동식료품공장, 교육도서인쇄공장, 평양종합인쇄공장, 평양자전거공장, 평양기계공업공장 등이 있다.
7. 관광[편집]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기타 외국인의 경우 평양을 방문하게 되면 의무적으로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해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예우를 갖추어 인사를 해야만 한다. 북한 정부에서 이를 강제로 시키기 때문에 거부하는 게 불가능하다.
또한 북한에서는 평양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통역관을 빙자해서 의무적으로 감시 요원을 할당하며 이 감시 요원의 범위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북한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경우 오토 웜비어의 사례가 있듯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서 죽을만큼 고문을 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평양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통역관을 빙자해서 의무적으로 감시 요원을 할당하며 이 감시 요원의 범위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북한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경우 오토 웜비어의 사례가 있듯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서 죽을만큼 고문을 한다.
8. 교통[편집]
평양시는 철도교통과 수송전선의 중심지로서, 평의선, 평부선(둘 다 본래의 경의선), 평원선이 지나며, 평양개성고속도로, 청년영웅도로, 평양순안고속도로, 평양원산고속도로가 지난다. 청년영웅도로는 평양시와 남포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로서, 10차선으로 매우 넓다.
- 항공 : 평양 순안 국제공항과 미림비행장이 있다. 국제선은 순안공항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데, 순안공항은 고려항공의 허브공항이다.
- 교량 : 대동강을 건너는 다리는 고구려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 조사로 알려졌다. 경의선을 부설하면서 놓은 대동강철교로 1905년 3월 24일 준공되었으며, 최초의 인도교인 대동교는 1923년 11월 30일 개통되었다. 1910년경 능라도에 수원지가 만들어져 평양 시내로 연결하는 수도관을 부설한 벽라교가 건설되었으나 해방 후 어느 시점에 없어졌다.
- 지하철 : 평양의 지하철은 서울특별시보다 1년 이른 1973년에 개통되었으며, 2개 노선이다. 1개 노선을 새로 신설할 예정이다. 평양의 지하철은 전시에는 방공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땅 속 깊이 건설되었다.
9. 유적지[편집]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지였으며, 단군왕검이 도읍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평양 주변에는 수천 년간 성을 쌓은 흔적을 비롯하여 낙랑, 고구려의 고분군과 선사 시대의 고인돌군 등 큰 규모의 무덤이 분포한다.
- 안학궁터
- 동명왕릉
- 을밀대
- 평양성
- 대동문
- 첨성대
- 대성산성
- 보통문
- 부벽루
- 칠성문
- 현무문
- 최승대
- 영명사
- 장안궁
10. 스포츠[편집]
4.25체육단, 평양시체육단 (두 팀 모두 최상급축구련맹전 소속)을 비롯한 여러 체육단이 평양을 본거지로 하고 있으며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11. 묘역 및 사적지[편집]
11.1. 묘역[편집]
평양의 묘역은 항일 유격대원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이바지한 사람들 위주로 조성되어 있다.
- 금수산태양궁전 : 대성구역에 있다. 다름 아닌 북한의 전직 수령들인 김일성과 김정일이 안장된 묘역으로 북한에서 가장 특별한 묘역이다. 김정은 역시 사망하면 이 곳에 안장되며 오직 북한의 수령들만 안장되는 특별묘역이다. 영구는 방부 처리하며 이 비용만 상당한 수준의 금액이 소모되고 있다.
- 혁명렬사릉 : 대성산에 있다. 1920~30년대 김일성과 함께 만주지역에서 이른바 항일유격대 활동을 했다는 지휘관급 132명의 묘역이 있다. 반신상과 분묘, 비석이 하나씩 놓여있다.
- 애국렬사릉 : 형제산구역 산미동에 있다. '조선의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인사 650여명이 있으며, 계속 늘어나고 있다. 돌사진과 분묘, 비석이 하나씩 놓여있다.
- 월북 및 납북인사들의 묘 : 룡성구역 룡흥 1동에 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거나 6 .25 전쟁때 서울에서 후퇴하면서 강제 납치하여 북송한 대한민국 인사 62명의 묘역이 있다.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현상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초대 국회의원 조헌영, 정인보 등 명망있는 인사들의 묘역이 있다. 돌사진과 분묘, 비석이 하나씩 놓여있다.
11.2. 사적지[편집]
평양의 사적지는 북한의 어느 사적지와 마찬가지로 김일성과 관계깊은 장소이다. 이러한 장소는 김일성 우상화 및 김일성주의의 목적으로 이용되며, 정권에 의해 성역화되어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 만경대고향집 : 김일성의 생가이다. 초가집과 당시 농기구가 복원ㆍ보존되어 있다.
- 칠골사적지 :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 창덕학교 : 김일성이 다닌 학교이다. 1925년 봄부터 1925년 1월까지 이 학교에 다녔다.
- 당창건사적관 : 김일성이 해방 직후 집무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건물이었다.
- 전승혁명사적관쑥섬사적지 : 1948년 5월 2일, 남북연석회의때 김구 선생과 김일성이 회담한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