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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이후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김정은
金正恩 | Kim Jong Un
파일:김정은 국무위원장.jpg
기본 정보
출생
1984년 1월 8일 (40세)
강원도(북한) 원산시 송천동 특각 602호 초대소
국적
본관
전주
학력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
김일성종합대학 경영학 학사
가족
아버지 : 김정일
어머니 : 고용희
배우자 : 리설주
자녀 : 김주은(장남), 김주애(장녀)
종교
군사 경력
복무
복무기간
2011년 ~ 현재
최종계급
대원수
조선로동당 총비서
임기
2021년 1월 10일 ~ 현재
제3대 최고 지도자
임기
2011년 12월 18일 ~ 현재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생애 초기3.2. 학창 시절3.3. 군 활동3.4. 권력 승계3.5. 연평도 포격전
4. 평가
4.1. 호화 사치 생활4.2. 우상화 및 권력 승계 비판4.3. 후계자시 경제개혁 지시
5. 논란과 의혹
5.1. 이름 논란5.2. 성형수술5.3. 모친5.4. 인권 침해 논란5.5. 사망설 논란5.6. 2021년 김정은 대역설 논란
6.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이다.

2. 상세[편집]

200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세우는 등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2010년부터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등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한 이후 3대 세습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원수가 되었다.

그는 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력 최고사령관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스위스 유학 중 사용된 가명은 '박운'이다.[4] 김정일 사후,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 통수자"로 칭해지고 있다. 2012년 4월 11일에 아버지 김정일을 이어서 조선로동당 제1비서가 되었으며, 4월 12일에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되었다. 2012년 7월 18일 원수로 진급했다.[5]

2016년 5월 9일 자신의 조선로동당 제1비서 직책을 폐지하고 조선로동당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새로운 권력을 얻게 되었다. 이후 2016년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무위원회를 신설했으며,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대신 국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을 영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적성국이었던 대한민국과 미국과 각각 정상회담을 두 차례씩 개최하여 국가지도자로서 세계 무대에 드러냈다. 또한 2021년 1월 10일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추대되었다.

3. 생애[편집]

3.1. 생애 초기[편집]

198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 겸 수반 김정일과 무용수 출신 네번째 부인인 고용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6] 친형 김정철이 있었고, 여동생으로 김여정이 있다. 그밖에 동복 누나 김혜경, 동복 형 김정남, 동복 누이 김설송, 김춘송, 친구 권우석 등이 있다.

당초 그의 출생 정보에 관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출생연도에 대해서 김일성(1912년생)과 김정일(1942년생)의 출생연도와 끝자리를 맞춰 1982년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며, 김정일과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는 1983년생이라고 밝혔으나, 후에 대한민국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에서는 김정은의 유학 시절 여권 등을 근거로 1984년생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출생지에 대해선 평안북도 창성군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강원도 원산시에 위치한 김정일의 별장 "602호 초대소''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3.2. 학창 시절[편집]

김정은의 어린 시절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프랑스를 거쳐 16세 때 스위스로 유학하여 김나지움(일반계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한다. 스위스 베른 근교의 중학교인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 유학, 유학 당시에는 '박운(박은)'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학교 기록 등에 따르면 중학교 인근의 한 초등학교에서 독일어 보충학습을 받은 뒤 1998년 8월에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해당)으로 편입되었다. 그는 9학년이던 2000년 말 학교를 그만뒀다. 당시 담임이었던 시모네 쿤은 마이니치(每日; 매일)신문에 “그가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서 ‘내일 귀국한다’고 말한 뒤,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200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이름이 김정운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와 로동신문 보도를 통해 김정운이 아닌 김정은으로 확인하였다.

3.3. 군 활동[편집]

귀국 뒤, 2000년대 중반부터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버지 김정일 및, 조선노동당과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2004년에는 아버지인 김정일의 권유로 조선 인민군에서 하전사로 입대하였으며 하전사로서 1년 6개월 동안 군복무를 한 이후 하전사에서 곧바로 중장으로 진급했다.

한편 김정일은 2009년 3~4월경 김정은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해 자신을 대신해서 엘리트들을 감시하게 하고, 김정일 사후에도 김정은이 엘리트들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 조직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우동측 부부장이 김정은의 보위부를 통한 엘리트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4. 권력 승계[편집]

2000년대 중후반부터 당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실질적인 무력 정치 활동이 시작되었다.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한 시점은 2009년으로, 대북 소식지가 이를 최초로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 파악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확인을 거부했으며,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와 같은 국내 대북 전문가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도 김정은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등을 들며 후계자 지명설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김정일이 자신의 후계자로 김정은을 지명한 것을 중국에 알리는 등 후계자 지명이 구체화 됨에 따라 후계자 지명은 기정 사실화되었으며, 김정일 유고시 김정은의 군부 장악 가능성에 대한 예측 보도가 뒤를 잇기 시작했다. 그 후 2010년 9월 27일 조선인민군 대장 임명, 28일 3차 노동당대표회의에서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및 당중앙위원 임명 절차를 거치며 김정은은 북조선의 국가통수권 후계자로 공식 확정되었다. 그동안 유년기, 청소년기의 사진으로만 알려져왔던 김정은의 얼굴은 후계자로 확정된 9월 28일 노동당대표회의 기념사진을 통해 언론에 공개된다. 10월 6일엔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된 것을 경축하는 행사를 벌인다.

김정은의 3대 세습체제 구축은 북조선 내외에 불만을 가중 시켰다. 북한 내부에선 3대 세습에 대한 반발 조짐이 일면서 김씨 부자를 비방하는 전단이 돌거나 폭약이 밀반입 되는 사건이 발생 했으며, 일본의 친북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내부 조직원들도 세습에 대해 반발을 보인다.

3.5. 연평도 포격전[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연평도 포격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연평도 포격에서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 등 여러 면에서 비판과 경제개혁 및 개방의 호평등 호불호가 갈리며 존재한다.

4.1. 호화 사치 생활[편집]

김일성 때부터 이어져 온 호화사치 생활은 단연 비난의 대상이 되며, 그러면서도 인민들의 의식주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인민을 굶겨죽이는 지도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의 2011년 1월 1일자 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보기관 분석결과, 북한이 총 1억 파운드(약 1734억 원) 이상을 들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을 위한 호화주택을 잇달아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요트 선착장과 사설 기차역 등이 설치될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밖에도 함경북도에서 김정은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주택이 건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4.2. 우상화 및 권력 승계 비판[편집]

하태경 열린북한 대표는 10월 10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북조선에서 진행 중인 우상화 작업에 대해 비난하였다. 김정남은 '중국의 마오쩌둥도 정권 세습을 하진 않았다'라며 세습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135] 이와 관련해서, 일본 산케이 신문은 김일성은 김정은을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장남 김정남을 후계자로 보았고, 김정은 등은 정식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도하였다.

4.3. 후계자시 경제개혁 지시[편집]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였던 김정은은 새로운 중국식 경제개혁 준비를 2011년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와 대외 경제 부서의 과장급 혹은 부원들을 파견보내어 중국식 경제개혁 사업을 지시하였다.

이때 12월 14일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 임대정책을 기본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하기로 결론내리고 2012년 4월에 경제개혁을 시행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때부터 상무조가 편성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 결국 김정일이 사망하였는데 결국 김정은의 지시로 중단없이 계속 4월로 확정이 되어 추진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다.[138]

하지만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의 한마디 때문에 4월의 경제 개혁 지시가 6월로 미루어져 있음을 알수가 있었고 간신히 무마되어 6월에 내각 상무조가 편성이 되어 12.1 경제개혁조치로 시행이 되어 독립채산제 및 포전담당책임제 시범 실시를 한 끝에 3월 1일 3.1 경제개혁조치가 실시됨으로 북한 전역에 독립채산제가 실시가 되었다.

2014년 5월 30일에는 김정은이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 내각 기관의 관리들을 모아놓고 5.30 담화를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고 이때 담화는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는 공장, 기업소, 협동조합이 생산 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에 기초해 실제적인 경영권을 갖고 기업 활동을 창의적으로 해 조선로동당과 국가에 지닌 임무를 수행하며, 근로자가 생산과 관리에 주인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게 하는 기업 관리 방법이라고 규정했다.

기업소는 제품 개발권과 품질 관리권, 인재 관리권을 행사해 지식 경제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기술, 새제품을 적극 개발하고 제품의 품질을 개선해 기업소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했다.

더불어 과학자와 기술자이 근로자들과 함께 첨단 돌파의 주인으로 내세워 기업소가 새 기술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족 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공장기업소와 협동농장에서 직장과 작업반, 분조 단위에서 근로자가 포전 담당 책임제와 독립채산제를 실정에 맞게 제시해 기계 설비와 토지, 시설물 등 국가적, 협동적 소유의 재산을 관리, 이용하도록 권장했다.

그리고 차등 임금제를 수립하여 월급을 일한만큼 많이 주어야 하고 공정하게 받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였음을 김정은이 담화로 발표를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다. 2021년, 조 바이든이 김정은과 대화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5. 논란과 의혹[편집]

5.1. 이름 논란[편집]

김정일 3남의 이름은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키무종운"이라 부르면서 김정운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름이 김정운이 아니라 김정은이라는 설이 퍼졌고, 9월 중순 원산 인근에서 "만경대 혈통, 백두의 혈통을 이은 청년대장 김정은 동지"로 표기된 선전벽보가 발견되었다. 일본어는 김정은이나 김정운이나 똑같이 "키무종운"으로 발음, 표기하기 때문에 처음에 일본인 요리사가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부터 혼선이 빚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원세훈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장은 "오래 전부터 김정은이라는 첩보를 갖고 있었지만 북한이 확인해줄 사항도 아니고 이름이 중요한 사항도 아니라 발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 및 일본에서는 한동안 김정운의 한자 표기인 '金正雲'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 후 한글 이름이 '김정은'이라는 것이 명확히 밝혀지면서 한자로 金正銀 또는 金正恩이라 쓰기도 했다. 10월 초, 조선중앙통신에서 김정은의 한자 표기는 金正恩이라고 밝히면서 일본 언론들과 중국 언론들은 金正恩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한편, 서방 언론권에서 쓰는 Kim Jong-un이라는 표기는 북한에서 여전히 사용하는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김정운과 김정은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5.2. 성형수술[편집]

중국 선전 위성TV는 2013년 1월 19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닮아 보이도록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중국 언론인 관야오(管姚)는 이 방송에서 북한을 방문했던 중국 외교관을 언급하며 "우리 외교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사적인 대화에서 북한 외교관에게 `김정은이 조부 김일성과 꼭 닮았다`고 하자 `성형수술을 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신화통신은 서울 주재 특파원과 평양 주재 특파원을 모두 연결해 보도 경위와 근거를 추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 주재 특파원은 "북한에선 김정은 성형과 관련된 보도가 한 번도 없었다"며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말했다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5.3. 모친[편집]

일반적으로 김정은의 어머니는 고용희(고영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복형 김정남은 김정은의 어머니는 고용희가 아닌 김옥이라고 증언했다.

5.4. 인권 침해 논란[편집]

2015년 탈북한 북조선(북한) 장교의 딸 임희연(가명)은 2017년 9월 3일 대한민국 서울 모처에서 영국 매체 '미러'(Mirror)와 김정은 정권에 관해 인터뷰했고, 미러는 2017년 9월 19일 이를 보도했다. 인터뷰에서 임희연은 수업을 받던 중 군사학교로 가도록 명령 받았고, 그곳에서 음란 영상물을 제작한 혐의로 11명의 음악단을 공개처형하는 것을 목격한 사실을 밝혔다. 처형된 악단들은 묶여있었고, 소리를 낼수 없도록 두건과 재갈을 씌운 상태였다. 북한은 음악단들을 대공포를 발사해 처형했으며, 처형할 때까지 악단들에게 채찍질을 했다. 이후 군용 탱크가 시신 위를 지나가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 짓밟았다. 북한은 이러한 과정을 1만여명에게 지켜보도록 명령하였으며, 임희연은 희생자들로부터 200피트 떨어진 상공에서 보았다고 말했다.

또한 임희연은 북한 관리들이 학교에 찾아와 10대 여학생들을 김정은의 성노예로 차출해간다고 주장했다.

5.5. 사망설 논란[편집]

5.6. 2021년 김정은 대역설 논란[편집]

2021년 김정은 대역설 논란은 2021년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9.9절) 행사때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대역일 수 있다는 설이다.

도쿄 신문은 “작년 11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체중이 140㎏대로 알려졌던 김 위원장이 날씬하게 변신했다. 다이어트를 한 것인지, 대역를 내세운 것인지를 둘러싸고 역측이 난무하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 신문은 과거 한국 국방부에서 북한분석관으로 일했던 고영철 다쿠쇼쿠 대학 주임연구원의 주장을 인용해서 10명 이상인 경호부대 소속 대역 중 한 명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옆 얼굴과 헤어스타일이 예전과 다른 데다 너무 젊어졌다는 이유다.

고영철 전 북한분석관은 김정은 위원장이 행사 당시 연설하지 않은 것도 대역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젊은 모습이기 때문에 10명 이상인 경호부대 소속 대역 중 한 명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역 의혹의 근거로 지난해 11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당시 모습을 거론하며 당시에는 목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볼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고 전했다.

북한정치학자인 난잔대학의 히라이와 준지 교수는 김정은 대역설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히와이라 준지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본인 같은 느낌은 든다, 2012년경 모습으로 되돌아간 인상을 풍긴다”고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도쿄 신문은 “올해 1월과 6월 보도된 김정은 위원장 사진을 보면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조금씩 날씬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국 국정원이 지난 7월 8일 10~12㎏ 감량했다는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고 밝혔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