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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이전·이후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金正日
| Kim Jong Il
파일:김정일 공식 초상화.jpg
기본 정보
출생
1941 2월 16일
소련 러시아 SFSR 프리모리예 지방 보로실로프시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우수리스크)
사망
2011년 12월 17일 (향년 70세)
평양시 룡성구역[추정]
국적
소련 → 파일:북한 국기.jpg 북한
본관
전주
학력
평양제1중학교
남산고급고등학교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
가족
아버지 : 김일성
어머니 : 김정숙
배우자 : 김옥
아들 :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딸 : 김혜경, 김설송, 김춘송, 김여정
종교
군사 경력
소속
복무기간
1980년 10월 ~ 2011년 12월 17일
최종계급
대원수 (사후 추서)
조선로동당 제2대 총비서
임기
1994년 7월 8일 ~ 2011년 12월 17일
제2대 최고 지도자
임기
1994년 7월 8일 ~ 2011년 12월 17일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출생3.2. 유년기3.3. 청소년기3.4. 청년기
4. 정치
4.1. 조선로동당 활동4.2. 인민군 지휘관 취임4.3. 정적 숙청4.4. 북한최고지도자
5. 사망6. 비판7.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북한의 2대 최고지도자였다.

2. 상세[편집]

김정일은 북한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였으며, 아버지 김일성과, 어머니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시를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귀환했다. 또한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에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1974년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되었으며, 1980년 제 6차 0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또한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북한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로 불린다.

3. 생애[편집]

3.1. 출생[편집]

김정일은 194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1942년에 백두산 근처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역사학자들은 이 주장이 거짓이라고 본다.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조작한 것은 김일성의 출생년도 1912년과 30년 주기로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들 김정일이 소비에트 연방(현재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고 하지만 이도 정확하지 않다. 김일성 일가가 뱌츠코예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거기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 중순이므로, 뱌츠코예는 김정일의 출생지가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또 소련군 시절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 아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으며, 소련군 문서에는 해방 후 평양에 온 뒤인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따라서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도 평양에 온 이후에나 가능하고, 소련에 있을 당시 이름은 유리 지체노비치 진(Юрий Жичэнович Цзин, Yuri Zhichenovich Jing)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라즈돌노예 기차역은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김일성 가족이 88여단이 창설되면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 태어난 것으로 선전하고 있으며, 이 밀영은 성역화되어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거니와,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 당시 백두산 속에 밀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그가 한동안 백두산 인근 만주의 창바이 현(長白縣), 푸쑹 현(撫松縣), 안투 현(安圖縣) 등지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식량과 물자 조달이 어렵고, 겨울이면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되는 백두산 깊숙한 곳에 밀영을 만들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그런 곳에서 한겨울에 김정일을 낳았을 가능성은 더욱더 없다. 해방 후 김일성을 항일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이미지를 덧붙이기 위해 지어낸 말이며, 백두혈통이니 하는 말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레오니드 바신도 후일 해방 직후 소련 군정 당시 일을 회상하며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자 "우리는 그가 진짜이고 백두산의 호랑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를 보아도 백두산의 이미지는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러시아어 이름 유리의 애칭인 '유라'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45년 8·15광복 이후 부모를 따라 북한으로 들어온 후로도 한동안 '김유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러시아식 이름을 버리고 김정일(金正一)이라 하였고,[12] 1980년에는 한자 이름을 正日로 개명하였다. 북한 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처음부터 김정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정일(正日)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김정숙(金正淑)의 '정'(正)과 아버지 김일성(金日成)의 '일'(日)을 합친 이름이다. 조부 김형직이나 조모 강반석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사망했으나, 증조부 김보현과 증조모 이보익은 그가 10대일 때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광복으로 귀국한 후, 김정일은 북한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김정일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자랐다.

3.2. 유년기[편집]

김정일은 1948년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남산소학교 인민반 졸업후 한국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어머니 김정숙에게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2월 10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 남한 정보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과 계모와의 관계 등으로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는 주로 독서와 시, 작문 등에 심취하였다.

3.3. 청소년기[편집]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16]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 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3.4. 청년기[편집]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급고등학교를 거쳐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 하였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문학과 시에 빠지기도 했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 및 공산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과 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과 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4. 정치[편집]

4.1. 조선로동당 활동[편집]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입당 초기 학생당원의 신분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 밑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다.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는 조직 및 선전 담당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2. 인민군 지휘관 취임[편집]

이후 조선로동당 조직담당 비서를 거쳐, 1990년 5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맡았으며, 1991년 12월 24일 당 중앙위 5기 19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일성이 40년간 맡고 있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승계받는다. 그 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조선인민군 원수라 하고 공화국 원수라는 계급을 별도로 신설하여 자칭하였다. 1993년 4월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의 국방위원회 위원장 겸임조항을 삭제하면서 국방위원장직도 넘겨받았다.

4.3. 정적 숙청[편집]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를 실각시킴에 따라 1990년대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행사 석상에서 김영주는 보이지 않게 된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이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넣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정일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22]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의 집권 이후 김성애 역시 공식석상에서 제외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전임되었다.

4.4. 북한최고지도자[편집]

1994년 아버지인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간의 유훈통치를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김정일 본인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하였으며 2009년 4월 9일에야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1991년 나진과 선봉 지역에 경제특구를 만들어 국제 교역의 거점으로 만들려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다시 재추대되었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김정일은 2008년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뒤 2009년 전후, 김정은을 '청년대장'으로 소개하였다. 이어 2010년 9월 김정은이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맡으며 공개석상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김일성 주석을 빼닮은 외모로 큰 관심을 끌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

2001년에는 여러 번 러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 등과 회담하였고, 푸틴이 답방하여 회담을 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하였으나 방문하지 않았다.

2009년 4월 9일에는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5. 사망[편집]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다.

김정일의 영결식은 12월 28일 평양시에서 거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고 추모곡이 작곡되었다.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열차가 아닌 평양 교외 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12년 2월 16일 71회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에 추서되었다.

6. 비판[편집]

자신의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정치범 수용소와 자유와 끔찍한 인권을 탄압을 자행했다. 현대판 봉건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이 대리청정체계로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테러리즘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아웅산 폭파 사건과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이런 테러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우방국들마저 외교관계를 기피하기 시작해 외교무대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정해져 적선국 제재를 받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완전히 소외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사회주회 경제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생상성 향상을 이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보장에 해가 될까 두려워 오히려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를 통해 수 많은 아사자가 나왔지만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50만톤 이상이기 때문에 아사자는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됐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또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등이 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명백한 배후이다. 북한은 군의 일반 지휘통제에 더해서 중앙에서 정치장교까지 따로 보내 2중으로 관리 통제하는 군지휘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통제력이 약한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사격 훈련 중 탄피분실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비상이 걸리 것을 대비해 본다면 최고지휘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저런 대규모의 도발을 실행할리 만무하다. 북한은 2009년부터 후계자에게 정권이양하는 과도기 과정이었고 2000년 이후부터 생겨난 장마당경제로 인해서 중앙권력의 약화를 우려해 화폐개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화하려 했지만 오히려 화폐개혁의 부작용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내부혼란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대남도발을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시켜 내부단속을 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는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한데 대해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28살 애송이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이상한 나라가 북한"이라며 "정부는 북한 권력층과 군부의 동향은 물론 관련 첩보 입수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북한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급변 사태에 대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7.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