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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18 민중항쟁추모탑.jpg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국립5·18민주묘지에 위치한 5·18민중항쟁추모탑
5.18 민주화운동 시작일
(1980년 5월 18일)로부터
D+16259
5.18 민주화운동
五一八 民主化運動
Gwangju Uprising
파일:5.18민주화운동 기념일.jpg
기간
1980년 5월 18일 ~ 5월 27일
장소
전라남도 광주광역시[A] 및 인근 지역
원인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에 대한 저항
계엄군의 폭동적 시위진압
병력
계엄사령부 전라남북도 계엄분소
제3공수특전여단
제7공수특전여단
제11공수특전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31보병사단
제10전투비행단
제3훈련비행단
전라남도경찰청
광주 시민 73만 명
시위대 20~30만 명
시민군 최소 340명
인적 피해[2]
군인 23명, 경찰 4명 사망[3]
군인 115명, 경찰 138명 부상[4]
시민 166명 사망
179명 실종[5]
2,617명 부상
결과
계엄군의 광주 점령
항쟁 세력인 시민군의 붕괴
민주화 저항세력 분쇄
영향
전두환의 권력 이양 및 11대 대통령 취임
신군부 독재(전두환 정부) 시작
6월 항쟁에 동기 부여
1. 개요2. 상세3. 명칭4. 발생 배경
4.1. 공수부대의 폭력적 진압의 배경
5. 전개6. 피해7. 영향력8. 정치인들의 평가9. 관련 판결10. 5•18 민주유공자 예우11.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5·18 민주화 운동,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2. 상세[편집]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1995년 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게 하는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뤄졌고, 1997년에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1997년부터 대한민국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다.[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본 사건을 "광주인민봉기"로 부르며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로 꽃잎,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서울의봄 등이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3. 명칭[편집]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민주화운동, 5·18, 광주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광주민중봉기, 광주시민항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극우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직후인 1988년 3월 24일 노태우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다.
이후 국회 진상조사특위가 구성될 당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측에서는 "민주화투쟁"이라는 명칭을 주장했으나, 노태우가 총재, 전두환이 명예 총재를 맡고 있던 집권여당 민주정의당은 '투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경우 투쟁의 대상인 신군부의 책임이 불거질 것을 우려하여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고집하였다.
결국 이에 통일민주당 측이 타협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합의되었다. 이후 문민정부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계승"을 자처하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함에 따라 공식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으로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4. 발생 배경[편집]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11월 7일에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했다. 하지만 12월 12일에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두환은 1980년 2월에 보안사령부에 지시를 내려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에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에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5월 11일에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황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5월 13일에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같은 날에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16]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로 말미암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에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였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 시위대 대열 속에 속했던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저지선을 돌파, 전경에 돌진하여 전경 이성재 일경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20]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에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자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신군부는 같은 날 새벽 2시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2,600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게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이날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에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공수부대의 투입에는 향토 사단장 정웅의 개입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정웅은 광주법정에서까지 부정을 하지만, 투입됐던 진압군의 증언에 의하면 정웅은 시위대의 강경진압/해산/전원체포를 주문한다.

4.1. 공수부대의 폭력적 진압의 배경[편집]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보안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1980년 3월 4일부터 3월 6일까지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 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 높게 실시됐다. 5월 10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하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 18시 23시 자로 2군사령관의 강조 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다.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다. 이같은 지침으로 인해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더욱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정간첩'(=고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5월 21일에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렇듯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이고 가혹한 진압을 하는 배경이 됐다.

5. 전개[편집]

6. 피해[편집]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약 200여 명이고 부상자 등 피해자는 약 4,300여 명이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이 통계 중 사망자 163명은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검찰은 1994년에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자 통계를 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며, 이 중 인정된 보상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1,628명 등 총 5,060명이다. 보상금 수령자 총 5,060명 중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할 경우, 보상금 수령자는 4,362명이다.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에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으로 말미암아 2001년 당시에 공수부대원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56]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1988년 7월,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제출된 국방부 답변자료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8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나이 가장 어린 사망자는 4세 가량의 남자 어린이로서 1980년 5월 27일 자로 목에 관통상을 입어 숨졌으며,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에 계엄군이 어린이들에게까지 총을 겨눴다는 사실이 드러나, 5.18 유족회 측이 학살자들에게 단호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에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5년에 1980년 당시의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는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 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에 달한다.

7. 영향력[편집]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으로 말미암아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을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재고됐다.

계엄사령부는 1980년 7월 4일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한 소요사태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에 5공 청문회를 거치고 국회에서 1995년 12월 21일에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66] 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이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에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2018년 7월 10일, 행정안전부는 '부적절한 서훈 취소(안)'을 심의·의결하여 5·18 진압 관련자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 5개와 국무총리 표창 4개를 취소하였다. 과거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훈·포장 68점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표창은 관련법이 없어서 대통령령인 '정부표창규정'의 개정을 통해 취소 근거를 마련하였다.

8. 정치인들의 평가[편집]

김영삼은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라고 하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5·18 민주화 운동의 교훈을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정신, 맨손으로 잔혹한 총칼에 맞섰던 비폭력 정신, 공권력의 공백 속에서도 질서의식을 가지고 치안을 지켰던 시민정신, 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화정신"이라고 규정하고, "광주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믿고 숭상하는 전 세계인의 자랑이며 인간승리의 대서사시"라고 평가했다.[74][75]

노무현은 5·18 민주화 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라고 연설하며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높이 평가했다.

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했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2008년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제28주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참가해 기념사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8년 전 오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 영령들 앞에 온 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그 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시는 5·18 민주화 운동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도 충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 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 사회를 이루는 데 큰 초석이 됐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는 "5·18의 민주화 정신은 많은 국가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다."라고 평가하며 광주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밝혔다.

레이건 정권 당시 리처드 앨런 전 미국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5·18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 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

한편 전두환과 5공의 핵심인사들은 2016년 6월 자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5·18 당시 광주 지역 계엄사령관, 2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계엄 상황의 군 명령 체계에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나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의 월권 행위는 있을 수 없다며 5·18에 대한 신군부의 개입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9. 관련 판결[편집]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사회 각계각층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를 고소·고발했다. 검찰은 1995년 7월에 5·18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라는 논리로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헌법재판소는 1995년 12월에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라는 취지의 인용 결정을 내렸다. 같은 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해 12·12 사건, 5·18 사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1997년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지 않고 있다.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준 천주교 신부에게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
  • 5·18 사건 대법원 판결 : 1997년,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 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 질서 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적시했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 관계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

10. 5•18 민주유공자 예우[편집]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은 1990년 제정 뒤, 2000년에 법률 제6122호까지 4차례 개정되었다. 유족의 범위와 보상지원을 위한 위원회 설치, 보상금과 각종 지원금 등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법률 제6650호)로 2002년 1월 26일에 제정된 뒤, 2004년에 개정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유공자와 그 유가족에게 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 양로지원, 양육지원 및 기타 지원을 실시한다. 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기념 추모사업을 실시하며 국립 5·18묘지를 설치한다.

11.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A] 현 광주광역시.[2] 영문 위키피디아 출처 불분명 내용-Gwangju Uprising 문서에 기초해 작성됨.[3]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4] 『오마이뉴스』 2010. 5. 4., 연합뉴스 2018. 3. 27.[5] 2019년 4월 9일 경향신문 단독보도에 따르면 공군 수송기가 "시체운송"을 이유로 김해로 출격한 5월 24일 이전에 69명이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접수된 정황을 포착해 이들의 시신이 김해로 이송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