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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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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요 ==
5한명회는 [[조선]]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6==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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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본관은 청주, [[자(이름)|자]]는 자준, 호는 압구정·압구·사우당이며, 별칭은 칠삭동이, [[시호]]는 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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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찍이 [[조선]] [[태조(조선)|태조]] 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이자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적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외증손이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 류태재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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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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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조(조선)|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이 되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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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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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오가작통법과 면리제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친아우인 한명진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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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명회/생애|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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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명회/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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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망 ==
211484년(성종 14년) 세자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니 황제가 '충직한 노한이 또 다시 왔다'면서 금전과 채단을 선물하였다. 이후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마련하여 유생들에게 한문을 권하였고 1485년(성종 15년)에 병을 이유로 치사를 청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성종에게서 지팡이와 의자를 선물로 하사 받았다. 그러나 1485년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서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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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야사에는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했다 한다.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자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도끼로 자신의 정강이 또는 자신의 집 대들보를 내리 찍었다고 한다. 그는 왕실과 이중으로 인척관계를 형성했는데, 그의 큰딸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을, 그의 작은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하였고 셋째 딸은 예종의 정비(장순왕후)가, 막내딸은 성종의 정비(공혜왕후)가 되어 영화를 누렸으나, 이 딸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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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487년(성종 17년) 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자 승지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임종 직전 남긴 유언에서 그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 하였다. 그해 음력 11월 14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향년 7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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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그는 관향인 충청북도 청주에 안장되기를 희망하여 처음에는 1476년(성종 6년) 1월 청원군 장명리에??안장되었으나, 곧 [[충청남도]] 천안군(현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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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88년(성종 19년)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산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 뒤 폐비 윤씨 폐출 사건을 막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하여 연산군 대에 와서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정창손 등과 함께 12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되어 시체는 토막내어졌으며 목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렸다. 그의 부관참시를 하던 날,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왔는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자 병사들이 그의 부관참시 집행을 주저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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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 이후 신원되어 복관되고, 1507년(중종 1년) 10월 예관을 보내 재장사한 뒤 세조의 묘정에 다시 배향하였다. 충청남도 천안군의 충성사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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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묘비문은 동문이자 오랜 친구이기도 한 서거정이 찬하였다. 생전에는 활달하고 호쾌하며 솔직한 성격으로 인정되었으나 세조 말기부터 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등용한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사림파들이 세조 이후 정치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그는 '간신'으로 격하되었으며, 그는 가장 '위대했던 간신'으로 평가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오래도록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그에 대한 전기와 전설, 작품 등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재평가,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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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둘째 딸 공예왕후 사후 폐비 윤씨가 폐출된 뒤,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 된 정현왕후는 한명회의 고모부 윤곤의 증손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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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000년 그의 묘소가 도굴되어 지석 등이 유출되었으나 2009년 6월 도굴범들은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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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한명회가 등장하는 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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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드라마 ===
40 * 1980년 고운인 여의옵고에서 배우 오지명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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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1984년 설중매에서 배우 정진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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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1990년 파천무에서 배우 주호성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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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1994년 한명회에서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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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1998년 왕과 비에서 배우 최종원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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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2007년 왕과 나에서 배우 김종결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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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2011년 공주의 남자에서 배우 이희도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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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2011년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배우 조희봉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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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2011년 인수대비에서 배우 손병호가 연기했다.
57=== 영화 ===
58 * 1988년 칠삭동이의 설중매에서 배우 정진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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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2013년 관상에서 배우 김의성, 우상전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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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2019년 광대들:풍문조작단에서 베우 손현주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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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 [[2026년]] [[왕과 사는 남자]]에서 배우 유지태가 연기했다.
65=== 연극 ===
66 * 2005년 길에서 이창수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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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 2008년 길에서 박정순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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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평가 ==
70성종때 이후 사림의 정계진출 이후 도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그가 계유정난과 [[세조찬위|세조 반정]]을 주도한 점이 집중 부각되어 비판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71== 의혹 ==
72왕조실록에 의하면 밀양 사는 박씨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억지로 이혼시키고 조카의 아내가 되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세조조에 한명회가 한언의 숙부로 밀양 사는 박씨가 재산이 많다는 말을 듣고 세조에게 청하여 전부와 이이하게 하고 언의 아내로 삼았는데, 성종조에 이르러 무릇 재가한 사족은 청현직에 서용하지 않게 되자, 홍윤이 형조의 낭관이 되어 대간의 논박을 받고 체직당하였기 때문에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끝내 변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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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여담 ==
74 * [[세조(조선)|세조]]는 나의 장량이라고 할 정도로 한명회를 총애했으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획득하기도 했다. 서울의 압구정동은 그가 만년에 여생을 보낼 목적으로 세운 정자이자 그의 아호인 압구정에서 유래한 지명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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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 정몽주의 서손녀이며 정보의 서누이동생 정씨는 한명회의 소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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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 야사에 의하면 그의 외모는 얼굴이 아래가 너무 넓게 퍼지고, 위는 좁고 뾰죽하여 마치 손으로 잡아 늘인 듯 길쭉한데다, 주먹코에 눈은 크고 눈동자가 바로 잡히지 않은 사팔뜨기로 극히 못 생겼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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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 그는 세조와 그의 장남이자 자신의 사위인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와도 이중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는 그의 셋째 딸이고,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는 넷째 딸로, 이들은 친정 자매간이면서 시가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관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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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 폐비 윤씨와는 먼 인척이었다. 둘째 사위 신주의 아버지 [[신숙주]]는 폐비 윤씨의 외당숙이다.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이자 금삼을 전한 군부인 신씨는 신숙주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 신주의 당고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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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송나라 정승 한충헌의 정자를 흉내내기 위해 명나라 한림원시강 예겸에게 정자 작명을 청하면서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는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년에도 부원군의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여 권좌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닌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후배 연일 정씨는 통의원사정종화의 딸이며 정몽주의 손녀이니 그가 서북 양도의 관찰사로 재직할 때 마음과 몸차림이 단엄한 것을 보고 함께 왔다. 전주 이씨 선천공조의 딸은 아버지의 이름이 정확히 전하지 않는다. 그가 서백이 되었을 때 이름 미상의 전주 이씨에게 사위 되기를 위협 받았는데 한명회가 승낙하지 않자, 그가 칼을 들고 사생결단하여 부득이 배필로 취하여 데려왔다. 집안에서 상하를 막론하고 두 부인을 부인으로서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세조가 그의 집에 방문하니 정종화의 딸 정씨, 이씨가 모셔서 술을 나누니 왕이 누구인지 물으니 양 부인이 뜰에 엎드려 그 원통한 사실을 울면서 하소연하자 세조가 형수라고 부르며 입시하도록 하여, 특별히 가져온 종이와 먹에 어필로써 직접 써서 교지를 전하고 양 부인에게 정경부인을 봉하는 옥새를 눌러주니 온 집안이 이때부터 양 부인을 괄시하지 않고 부인의 예로써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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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본 문서 정보 ==
86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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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AA%85%ED%9A%8C|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