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본명 | 김대건(金大建) |
아명 | 김재복(金再福) |
출생 | |
사망 | |
사인 | 참수형 |
국적 | |
본관 | 김해 김씨 |
가족 | 아버지 : 김제준 어머니 : 고 우르술라 |
직업 | 사제 순교자 |
종교 | |
수호 | 한국 성직자 |
1. 개요[편집]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2. 생애[편집]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솔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제준, 어머니는 고 우르술라였고 10대조 김희현이 아산 현감을 역임했으며 9대조 김의직은 충청병마절도사 재직시 임진왜란에서 전훈을 세우자 가문 대대로 토지와 벼슬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헌부감찰과 통훈대부를 지낸 8대조 김수완 때부터 김대건의 가문이 솔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784년 경 김대건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하급 관리였던 증조부 김진후도 관직에서 물러나 입교해 가문이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신유박해로 인해 증조부 김진후는 1801년부터 감옥에 드나들기를 반복하더니, 1804년에는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해미성지에서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인 김한현은 1816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되었다. 기해박해 여파로 아버지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을 서양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을 보낸 중죄인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또한 당고모였던 성녀 김 데레사도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840년 초 서울포청에서 교사되었다. 김대건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김대건이 태어날 때 이미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시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였다. 15살 때인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 진쟈상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1845년 8월 17일 사제로 서품돼 그 해 10월에 귀국한다.
1784년 경 김대건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하급 관리였던 증조부 김진후도 관직에서 물러나 입교해 가문이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신유박해로 인해 증조부 김진후는 1801년부터 감옥에 드나들기를 반복하더니, 1804년에는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해미성지에서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인 김한현은 1816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되었다. 기해박해 여파로 아버지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을 서양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을 보낸 중죄인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또한 당고모였던 성녀 김 데레사도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840년 초 서울포청에서 교사되었다. 김대건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김대건이 태어날 때 이미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시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였다. 15살 때인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 진쟈상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1845년 8월 17일 사제로 서품돼 그 해 10월에 귀국한다.
3. 마카오 유학[편집]
김대건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에 의해서였다.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프랑스 출신인 모방 신부는 1836년 1월 12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와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를 돌면서 신도들에게 영세를 주는 한편, 한국 최초의 신학생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 신학교로 보냈다.
김대건은 이들 중 제일 마지막으로 선발되었는데, 그가 선발된 것은 모방 신부와 더불어 김대건의 부친인 김제준과 친한 정하상이 중간 역할을 하였다.
모방신부는 조선에 입국할 당시 신학교 설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모방 신부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 이들을 교육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37년 6월 7일이었다.
김대건은 1842년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라틴어를 비롯한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 시기에 동료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했고 마카오에서 소요가 일어나 필리핀 마닐라로 잠시 피신하기도 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신학생 시절 김대건은 7명의 서양신부로부터 라틴어와 철학을 비롯하여 천주교 교리를 교육받았다. 마카오의 조선신학교는 임시로 설립된 것이라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신부들은 조선 신학생들의 자질을 높이 샀고, 교육에 애정을 보였다.
당시 초대 교장이었던 칼레리 신부는 이들 3명의 조선신학생들에 대해 “사제가 갖추어야 할 훌륭한 덕목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대건은 이들 중 제일 마지막으로 선발되었는데, 그가 선발된 것은 모방 신부와 더불어 김대건의 부친인 김제준과 친한 정하상이 중간 역할을 하였다.
모방신부는 조선에 입국할 당시 신학교 설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모방 신부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 이들을 교육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37년 6월 7일이었다.
김대건은 1842년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라틴어를 비롯한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 시기에 동료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했고 마카오에서 소요가 일어나 필리핀 마닐라로 잠시 피신하기도 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신학생 시절 김대건은 7명의 서양신부로부터 라틴어와 철학을 비롯하여 천주교 교리를 교육받았다. 마카오의 조선신학교는 임시로 설립된 것이라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신부들은 조선 신학생들의 자질을 높이 샀고, 교육에 애정을 보였다.
당시 초대 교장이었던 칼레리 신부는 이들 3명의 조선신학생들에 대해 “사제가 갖추어야 할 훌륭한 덕목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4. 한국 최초의 신부 탄생[편집]
1842년 마카오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할 때까지 김대건의 생애는 가시밭길이었다. 마카오를 떠나 요동에 도착한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1차 실패하고 중국 만주에 남아 있었다. 그가 잠시나마 조선 입국에 성공한 것은 그해 12월 27일이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라 할 수 있는 책문을 넘어 꿈에 그리던 조선땅을 밟아 본 것이다.
김대건이 부제품(사제 전 단계)을 받은 것은 1844년 12월이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5년 1월 1일 책문에서 조선에서 온 밀사들을 만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월 15일이었다. 조선 정부는 김대건이 신학공부를 위해 조선 땅을 떠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일급 수배자 신분이었다. 비밀리에 서울에 잠입한 김대건은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준비와 조선순교사를 집필하였다. 이어 4월 30일 11명의 교우 및예비 교우들과 함께페레올 주교를 데리러 인천을 출발하여 상해로 향했다.
조선을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한 김대건은 마침내 사제에 서품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가 탄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서품을 받은 후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8월 31일 상해를 출발하여 10월 12일에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에 도착하였다.
이후 순교하기 전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오가며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김대건이 부제품(사제 전 단계)을 받은 것은 1844년 12월이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5년 1월 1일 책문에서 조선에서 온 밀사들을 만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월 15일이었다. 조선 정부는 김대건이 신학공부를 위해 조선 땅을 떠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일급 수배자 신분이었다. 비밀리에 서울에 잠입한 김대건은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준비와 조선순교사를 집필하였다. 이어 4월 30일 11명의 교우 및예비 교우들과 함께페레올 주교를 데리러 인천을 출발하여 상해로 향했다.
조선을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한 김대건은 마침내 사제에 서품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가 탄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서품을 받은 후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8월 31일 상해를 출발하여 10월 12일에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에 도착하였다.
이후 순교하기 전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오가며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5. 순교[편집]
교세 확장 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외국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항로 개척이었다.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5.1. 장례[편집]
신봉승 사극작가에 따르면 김대건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현재 서울 노량진)에서 12명의 사형집행인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목이 군문에 걸려 효수되었다. 본래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가도록 되어 있지만 김대건의 시체는 가매장되었다. 비밀리에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김대건의 시신을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안의 성당에 이장되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부르키나파소 쿠펠라대교구의 '성요셉성당' 제대에 안치될 예정이다. 필리핀 교황대사관 1등 참사관 까보레 몬시뇰은 과거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한국교회의 순교 역사와 순교 성인 공경에 감명을 받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돌 희년’을 맞아 유해를 부르키나파소의 성당에 봉안하고 싶다고 염 추기경에게 요청했다.
5.2. 시성[편집]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김대건을 가경자로 선포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5.3. 순교비[편집]
김대건(안드레아)신부 순교비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성당에 있는 비석이다. 2017년 12월 29일 익산시의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사유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비는 익산 나바위 성지 내 화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으며 나바위에 김대건신부가 상륙한지 110년, 본당 건축 50주년을 기념하고자 건립됐다.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첫발을 디딘 곳임을 알리기 위해 신부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로호를 연상해 같은 크기(길이 4.5m 넓이 2.7m 깊이 2.1m)로 제작됐다.
지정 사유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비는 익산 나바위 성지 내 화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으며 나바위에 김대건신부가 상륙한지 110년, 본당 건축 50주년을 기념하고자 건립됐다.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첫발을 디딘 곳임을 알리기 위해 신부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로호를 연상해 같은 크기(길이 4.5m 넓이 2.7m 깊이 2.1m)로 제작됐다.
5.4.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편집]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 唐津 솔뫼마을 金大建神父 遺蹟 | |
지정일 | 2014년 9월 26일 |
지정종목 | 사적 |
시대 | 조선시대 |
크기 | 면적 2,000㎡ |
위치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116 |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은 충청남도 당진시에 있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신부(를 비롯하여 김대건신부의 증조할아버지(김진후), 작은할아버지(김종한), 아버지(김제준) 등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이다.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146호 김대건신부생가지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9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29호로 승격되었다.
사적 지정사유로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은 우리나라 천주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신부가 태어난 장소로 전해지며,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발생한 천주교 전래 및 사상과 신앙의 자유에 대한 박해과정 등을 집약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종교사적으로 지정되었다.
6.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편집]
김대건 신부가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2019년 11월 14일, 유네스코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제40차 총회를 열고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부합한다는 점을 들어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1] 충남 당진시는 2019년 6월에 프랑스,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으로부터 지지 선언을 확보한 뒤 유네스코에 세계기념인물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따라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19년 10월 17일 제207차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를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할 것을 권고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과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선정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적 변천을 반영하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적 변천을 반영하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7. 여담[편집]
- 가톨릭평화방송에서는 김대건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를 제작하였는데, 심문하는 관리가 김대건에게 "천주님이 계시다면 왜 너를 돕지 않으시냐"라고 물으며 마음을 흔드는 내용을 삽입하는 등, 기독교 신앙이 박해받는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적인 면을 부각하였다.
- 계몽사 위인전기 전집에 김대건 전기가 있다. 이우범 화백이 그림을 맡았으며, 구중서 선생이 글을 썼다. 김대건의 경건한 신심과 자비를 담았다. 편집자는 김대건이 천주교 사제가 된 상하이 금가항 성당 사진도 실었다.
- 만약 가톨릭 입교자가 김대건을 세례명으로 쓸 경우, 이름과 세례명을 합친 대건 안드레아가 신자의 세례명이 된다.
- 1972년 5월 12일 동상 제막식이 열렸는데 최성모 신동아그룹 창업주가 자금 전액을 헌납하기도 했다.
- 2023년 9월 16일 오후 4시 30분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이 세워졌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1] 한복 입은 초상화는 김대건 신부가 한국 103위 순교성인과 함께 시성된 1980년대부터 사용되고 있으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로서 김대건 신부가 갖는 민족적 대표성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