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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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안철수
1. 학창 시절2. 의사 생활과 백신 개발3. 벤처기업 CEO 생활4. 유학·교수 생활과 이후5. 정치 활동
5.1. 서울시장 선거 출마5.2.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5.3. 제18대 대선5.4. 국회의원 당선5.5.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취임5.6. 새정치민주연합 탈당5.7. 국민의당 창당과 총선 약진5.8. 대국민 사과와 당대표 당선5.9. 바른정당과의 통합 추진5.10. 서울특별시장 낙선5.11. 국민의당 창당5.12. 제21대 국회의원
6. 본 문서 정보

1. 학창 시절[편집]

본관은 순흥이며, 1962년 2월 26일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에서 아버지 안영모 원장과 어머니 박귀남 여사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과학자를 꿈꾸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 60명 중 30등을 할 정도로 평범했으며 특별히 잘 하는 것이 있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부산동성국민학교 재학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매일 몇 권씩 읽어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게 됐다고 한다. 도서관 사서는 매일 몇 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친다고 생각해서 책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안철수는 "당시 책의 페이지수, 발행 년월일, 저자까지 모두 다 읽고,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마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 중독증이었던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수업 교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과학책이나 소설책을 좋아해 주로 읽었는데 책을 좋아했던 탓인지 사춘기도 없었다고 한다.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1979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1등을 차지하였고 1980년, 서울대학교 의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많은 의대에서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3학년 재학 중이던 1982년 가을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하면서 이후 본격적으로 컴퓨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2. 의사 생활과 백신 개발[편집]

1986년, 드디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생리학 교실에서 기초의학을 전공했다. 1988년 동방 결절 내에서의 흥분 전도에 미치는 Adrenaline, Acetylcholine, Ca++ 및 K+의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의학 석사 학위를, 1991년 토끼 단일 심방근 세포에서 Bay K 8644와 Acetylcholine에 의한 Ca2+ 전류의 조절기전이라는 논문으로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심장 부정맥을 연구하는 ‘심장 전기 생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그가 컴퓨터를 공부한 이유는 의사로서 전공 실험을 더 잘하고 특기를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소프트웨어 전문 잡지 마이크로 소프트웨어에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한국에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자신의 컴퓨터와 50장가량의 디스켓을 검사해보니 3장의 디스켓이 바이러스에 감염 되어 있었다. 프로그램의 세부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확인해보니 프로그램에 누군가 (c)Brain이라고 써놓은 것이었다. 그 바이러스는 최초로 파키스탄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떤 형제 둘이 컴퓨터 가게를 차려 자기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팔아 가게를 운영하려 했는데 하나만 팔아도 불법 복제가 되어 가게가 망하자 이 형제들이 화가 나 불법 복제를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바이러스의 시작이었다. 이 바이러스의 원본에는 만든 사람의 이름, 주소, 집전화까지 모두 표시되어 있었으나 국내에 유입된 바이러스에는 그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지워져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한국까지 오는데 3년이 걸렸다. 그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손에서 손으로 파키스탄에서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바이러스 때문에 디스켓이 파괴되는 일이 많았으나 당시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철을 타면 디스켓이 깨진다.”,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긴다.”는 등의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안철수는 전공실험을 위해 열심히 배워두었던 컴퓨터 언어 공부를 막 끝낸 참이어서 절묘한 시기에 바이러스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던 중 후배가 안철수에게 찾아와 바이러스를 치료할 방법을 묻자 안철수는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후배가 이해하지 못하자 본인 자신이 직접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는데 밤을 세워 분석한 끝에 1988년 6월 10일 바이러스가 감염된 과정을 반대로 하면 치료할 수 있겠다 생각하여 ‘백신’(Vaccine)이란 이름의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에 성공했다. 이것이 V3 최초 버전인 V1이다.

처음으로 문서화된 컴퓨터 바이러스 제거 프로그램은 1987년에 발표된 번트 픽스(Bernd Fix) 인데 안철수는 “세계 최초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인 V1을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고 “미국의 백신 대기업들도 V1보다 1년 늦게 만든 것들이었다.”라고 말했다. 바이러스 치료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안철수에게 도움을 요청해오기도 했다. 그 뒤로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혼자서 만든 백신을 무료로 배포했다. 이후 당시 악명을 떨친 LBC, 예루살렘 바러이스 등을 치료하는 기능이 추가된 ‘V2’, ‘V2Plus’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였다. 특히, V2Plus는 모기업이 디스켓으로 제작하여 무상으로 컴퓨터상가 등지에 대량 배포됐고 당시 상인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렇게 낮에는 의사, 밤에는 백신 제작자로 7년간 이중 생활을 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만큼 나도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의사 생활과 백신 제작을 모두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백신을 제작을 하고, 의대에 가서는 박사 과정으로 생활했다. 당시 한국에는 안철수를 제외하고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돈벌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 벤처기업 CEO 생활[편집]

의사 생활과 백신 개발을 하는 생활을 7년 정도 했는데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매년 2배씩 증가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의대 교수로 재직하려면 지도 학생을 받아야 하는데 지도 교수가 학생 몰래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학생은 불행한 것이라 생각하였고, 반년간의 고민 끝에 의사 생활을 포기하고 더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백신 제작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그러나 돈벌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7년 동안 모아놓은 모든 백신 자료들을 가지고 비영리 공익 법인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려고 정부 부처를 다니며 관계자들을 설득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특히 삼성 소프트웨어 관련에도 찾아가 삼성 로고를 달고 배포한다고 약간의 돈과 인력을 지원해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던 중 소프트웨어 업체 관계자가 찾아와 기업을 만들라는 조언을 해왔고 안철수는 그 의견에 동의하여 1995년 3월 15일 창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안철수연구소이다.

당시 백신시장에 개인용 백신은 무료배포가 많았던 시기라 개인사용자들에 한해서 1989년부터 도스용 백신 소프트웨어인 V3+ 네오라는 백신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후 V3+ 네오는 시그니처 수의 증가로 인해 당시 가장 보편적인 저장매체인 3.5인치 디스켓 2장이 필요하는 등 실제 이용이 매우 어렵고 제한되게 되었다. 결국 한동안 무료백신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던 안연구소는 알약 등의 경쟁 무료 제품의 확산을 막기 위해 빛자루 제품을 유료에서 무료로 바꾸고 V3 라이트라는 무료 제품을 연이어 출시한다. V3+ 네오는 V3 라이트 출시 이후 단종되었다. 안철수는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4년 간은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월급날은 매월 25일이었는데 월초부터 직원들의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이었고 자신이 월급을 받지 않고 직원들의 월급을 줄 때도 있었다.

회사를 세우고 몇 개월 지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공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였다. 안철수가 미국 유학 중 1997년 미국의 거대 백신업체 맥아피에게 1000만 달러에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안철수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갔다. 보통 대기업이나 재벌그룹 회장 정도가 되면 직접 발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당시 인수에 의욕을 가졌던 맥아피 회장은 안철수 앞에서 직접 발표를 하며 인수를 제안했으나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회장은 이전에 자신에게 회사를 매각했던 일본인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시켜줬다. 일본 대표는 “당시 회사가 적자나서 힘들었으나 많은 돈을 받고 회사를 팔고난 후 걱정도 없이 잘 지낸다”라며 안철수에게 회사를 팔라고 설득했으나 안철수는 끝내 거절했다. 당시 맥아피는 전 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당시 안철수연구소 때문에 한국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인수한 후 안철수연구소를 폐기하고 미국 백신으로 한국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수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회사를 매각한다면 그 후에 직원들이 해고되어 실업자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또한 한국의 백신이 맥아피같은 해외 업체에 의해 장악당하는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던 것이었다. 그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감정을 소비하는 후회는 원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1999년 4월 26일 CIH 바이러스(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이 일어나면서 적자가 나던 회사는 흑자로 전환됐다. CIH 바이러스로 인해 30만대가량의 컴퓨터가 파괴되어 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수천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바이러스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화하게 되어 백신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직원이 50명가량이었는데 하루 종일 전화가 걸려와 업무가 마비될 수준이었고 컴퓨터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매출은 급증했고 1999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한글과컴퓨터에 이어 두 번째로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했고 이후 세후 순익 100억원 돌파는 안철수연구소가 최초로 달성했다.

4. 유학·교수 생활과 이후[편집]

2005년 당시 회사의 경영 사정은 매우 좋았으나 다른 벤처 기업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안철수는 자신의 능력을 산업 전반에 쓸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1년 간 고민했고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회사를 창립한지 만 10년이 되는 날인 2005년에는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했고 대신 이사회 의장 자리를 맡았다. 당시 발표날까지 직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안철수는 2000년에도 안철수연구소 전 직원 125명에게 각각 650주씩, 자신의 지분에서 총 8만주 (전체 발행 주식수의 1.5%)를 나눠준 바 있다. 그는 “전체가 잘될 수 있다면 개인적 이해타산과 상관없이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갖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CEO를 그만두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에서 MBA (최고 경영자 교실) 2년 과정을 밟았다. 같은 시기에 딸도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그 이유는 안철수의 아내가 나이 마흔에 ‘법’을 배우고 싶다며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 로스쿨에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5년을 공부한 아내는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시기에 안철수도 뒤늦게 미국 최고 경영자 교실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수업을 마치고나서 가족이 도서관에 모두 모여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가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08년 4월 30일 귀국한 안철수는 KAIST 경영학과 교수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다가 2011년 6월부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대학원장으로 부임하면서 2012년 9월까지 역임했다. 2005년에는 포스코의 사외이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2010년에는 포스코 이사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2010년부터 안철수연구소의 사내벤처로 출발한 소셜 네트워크 게임업체인 노리타운스튜디오의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2001년 5월 18일 김대중 정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제5분과(교육정보) 자문위원으로 위촉됐으며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국민대표로 8인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2010년 6월부터 이명박 정부 말기까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제2기 민간위원직을 수행하였다. 2011년에는 학교법인 포항공과대학교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5. 정치 활동[편집]

5.1. 서울시장 선거 출마[편집]

안철수는 정치권에서 정계 입문 제의를 많이 받아왔다.

서울시장 출마 고민에 대해 안철수는 “행정이기 때문에 고민을 시작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장 이렇게 여러 일 때문에 (서울시장) 자리가 열려있는데 이걸 또 이상한 사람이 망치면 분통 터지는 일이다. 그게 고민의 시작점이었다. 정말로 자격 없는, 정치적 목적으로 시장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에서다”라고 말했다.[45] 안철수의 이러한 인식이 드러나면서 민주당은 안철수 영입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민주당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시민운동을 한 박원순 변호사를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중인 가운데 안철수는 박원순과도 대화를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시장 출마를 확답한 적이 없으며 여론조사 등을 더 지켜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행정 운영을 통해 서울시를 바꾸려면 최소한 10년은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도 고민”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 제기된 ‘윤여준 멘토설’에 대해 안철수는 “개인적으로 따로 윤여준을 만난 일은 없었다. 솔직히 석 달 전 윤여준을 처음 뵙기 전까지는 이름도 몰랐다.”라며 “그 분이 제 멘토라면 제 멘토 역할을 하시는 분은 한 300명 정도 되고, 또 저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김제동씨나 김여진씨도 제게 멘토라 할 수 있다.”라며 부인했다. 그는 “정치인인 국회의원은 혼자서 바꿀 수 없는게 많지만 대통령이나 서울시장같은 행정가는 자신 혼자서 바꿀 수 있는게 많기 때문에 의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안철수는 국민일보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35%를 넘어 2위인 나경원(13~17%)을 두 배 이상 제쳤다. 자신의 지지율이 높은 것에 대해서 “지금 사람들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비교가 안 된다. 건국 이래 역사상 가장 심하다. 아직 만으로 40대인 나 같은 사람이 아직 (출마를) 할지 말지도 결정 안했는데, 저렇게 역사가 오래된 당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면 그게 민심이다. 나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철수의 서울시장 선거 출마 여부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던 2011년 9월 4일에 주요 언론사들은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모든 여론조사에서 안철수의 지지율은 압도적이었지만 안철수는 자신과 오래전부터 각별한 관계였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다음날 9월 5일 출마를 양보할 수도 있다고 했고 그 다음날인 9월 6일 오후 4시에 박원순과 만나 불과 17분 동안의 대화 끝에 박원순으로 단일화했음을 발표했다.

박원순은 단일화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시장직 자리를 원한 게 아니다. 진정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결론이 나온 것”라고 말했다. 박원순은 또 안철수에 대해 “아무리 신뢰관계가 있다해도 저보다 10배나 더 되는 지지도를 갖고 있던 분이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내 말) 한마디로 양보한다는 게 사실 또 믿기 어려운 그런 일”이라며 “안 교수가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어떤 공공적인 이익을 위해서 해왔던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태도였다고 본다”라고 말했다.[58] 이후 박원순, 한명숙, 문재인 등은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범시민 야권 단일후보를 통해 한나라당과 1:1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박원순-한명숙 두 사람은 범시민 야권 단일 후보 선출을 위해 상호 협력하고, 이후엔 선거 승리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인다”라며 결의를 다졌다.

안철수의 불출마 선언에 대해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안 원장은)50%대의 지지율을 가지고도 5%대의 지지율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양보했다. 그것은 조중동과 이명박 정권이 그토록 핍박하고 무시하던 시민사회의 상징과 가치에 대한 공개적인 인정이었다.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커밍아웃이다”라고 극찬했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조국 교수는 “우월한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교수 양보. 큰 박수를 보낸다. 이 분의 ‘쓰임’은 또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정치판이 바뀔 조짐이다. 통큰 단결로 서울시장 선거, 총선,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안철수, 과연 ‘인물’이군요. 이 정도 열풍이면 보통 사람 같으면 정신이 멀쩡해도 취할 텐데, 50%의 지지율에도 흔쾌히 양보. 이번에 박 변호사 도와주시고, 그보다 더 큰 물에서 뜻을 펼치세요”라고 말했다.[60]

안철수의 아버지 안영모는 “안철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사람이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안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렸다”고 말했고 대선출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말릴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들 나이도 50이 넘었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리가 말려서 되겠나. 이제부터는 일절 말 안 하고 지켜만 보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5.2.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편집]

안철수에 대한 여론의 관심에 대해 언론들은 ‘안철수 신드롬’, ‘열풍’ 등의 표현으로 보도했다. 안철수가 서울시장 후보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인 이후 언론은 차기 대선 여론조사 대상에 안철수를 포함시켰다. 안철수는 박근혜와의 1:1 가상대결에서 43.2%를 기록해 40.6%를 기록한 박근혜를 이겼다. 이명박 정부 들어 박근혜가 차기 대선 지지율 2위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휴대전화 여론조사에서는 안철수 59.0%, 박근혜 32.6%로 나와 차이가 더 벌어졌다. 특히 야권 후보들 중에는 지지율 31%를 기록해 2위를 차지한 문재인(16%)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안철수는 20~30대 젊은층, 대학생, 화이트칼라, 호남지역에서 60% 이상의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서울지역에서도 54%의 지지율을 보여 박근혜를 넘어섰다. 하지만 안철수는 2012년 대선 출마에 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2011년 9월 7일 안철수는 출근길에서 차기 대선 출마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가당치도 않죠. 사실. 생각해볼 여유도 없고...”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 강남지역 총선 출마설이 돌자 2011년 12월 1일 기자회견을 열어 “제3당 창당이나 강남 출마설 등 여러 가지 설들이 많은데 분명한 것은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말했고 대선 출마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또한 일각에서는 안철수가 이미 정치적 야심을 품고 2011년 11월부터 대선을 겨냥한 ‘과외’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북한문제에 관해서는 햇볕정책 지지자인 김근식 경남대학교 교수가 안철수를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 야당 중진의원 등 전문가들이 경제, 국제관계 등 각 분야에서 안철수를 돕고 있었다고 알려졌다.[78] 김근식 교수는 언론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안철수에 대해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제 시각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안철수와 전문가들의 만남을 주도한 것은 김효석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이다. 안철수의 지인인 김종인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은 “지난 10월부터 민주통합당 중진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안 원장이 공부모임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5.3. 제18대 대선[편집]

민주통합당 문성근 최고위원은 2012년 1월 25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해 “대선 후보로 뛸 생각이 있다면 민주통합당 경선에 나와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012년 4월 16일 중앙일보는 안철수가 제19대 총선 이전 대선 출마 결심을 굳혔다는 보도를 냈으나 안철수의 측근은 이를 부인했다.

같은 해 7월 19일 안철수는 정치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 국가 중대사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아는 범위내에서 서술하였으며 정치권에서는 비록 책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발간으로 정치적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책 출간 하루 전 7월 18일 SBS의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 녹화 작업을 했으며 7월 23일 방송되었다.

같은 해 9월 19일 안철수는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각종 여론조사시 유력한 대권주자였으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 과정에 여러 가지 마찰이 있었으며 2012년 11월 2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12월 6일 안철수는 문재인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발표, 12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부산, 군포, 대전, 광화문에서 문재인 후보와 4번의 공동유세를 하였고 대구, 강원, 전북 등 전국 40여 곳에서 지원유세를 하였다. 문재인은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에게 패배하였다.

5.4. 국회의원 당선[편집]

2013년 4월 24일 실시된 노원 병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60.5%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된 안철수는 무소속 국회의원의 국회 상임위원회 배정 권한이 있는 국회의장과 상의 없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배정을 희망하였고, 여야 원내대표 이한구와 박기춘은 합의하여 안철수의 보건복지위원회 배정을 결정하였다. 이에 국회의장 강창희는 여야 원내대표인 이한구와 박기춘을 불러 국회법을 무시한 것에 대해 질책하였고, 보건복지위원회는 안철수의 보건복지위원회 배정 희망 신청서를 거부하였다. 이후 5월 23일 강창희는 직접 안철수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배정하였으며,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 등을 고려해 안철수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배정하였다고 국회 대변인 배성례는 언론에 밝혔다.

5.5.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취임[편집]

한편 안철수는 2013년 11월 28일 국민과 함께하는 새정치 추진위원회(새정추)의 출범을 알렸다. 추진위는 향후 건설될 예정이었던 안철수 신당의 모체가 될 것으로 보였다. 이듬해 1월 21일에는 3월 안으로 정식 정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2월에는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신당창당작업에 나섰다가 3월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전격적으로 제3지대 신당창당을 선언하여 3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하고 1기 공동대표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2014년 7월 재보선에서 참패했으며, 이후 대표직을 사퇴했다.

5.6. 새정치민주연합 탈당[편집]

문재인 대표가 조선대 강연에서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즉, 문.안.박 체제로 지도부 구성을 하자 하였으나, 안철수 의원이 거부하였다. 안철수 의원은 다시 역제안으로 혁신전대를 제안했으나, 문재인 대표는 거부하였다. 안철수 의원은 12월 6일 경 국회 정론관에서 문재인 대표에게 혁신전대 거부를 재고 하라며 사실상 최후통첩을 날렸다. 하지만, 문재인 대표는 이를 다시 거절하였다. 6일 최후통첩 성격의 기자회견 후 칩거중이었다가 12일경 다시 노원구 자택에 돌아왔다. 12일 자정 즈음, 문재인 대표가 노원구 자택에 안철수의 탈당을 막으려 찾아왔지만, 밖에서 악수만 한 채 불발되었다.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던 13일 오전, 국회 정론관으로 가는 도중 차에서 문재인 대표와 협상 하려 문재인 대표와 통화를 했지만 결국 협상에 실패하였다. 이날 오전 10시 경 안철수 의원은 국회 정론관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을 떠나며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겠다며 탈당을 선언하였다.

5.7. 국민의당 창당과 총선 약진[편집]

2015년 12월 13일경 새정치민주연합 (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안철수, 김한길, 천정배 등이 중심이 되어 2016년 2월 2일에 창당하였다. 영문이름은 "The People's Party"다. 2016년 1월 1일부터 1월 6일까지 국민들을 상대로 당명을 공모하였으며, 당명 이름을 "국민의당"으로 확정하였다. 이후 1월 10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고, 윤여준, 한상진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창당준비위원회를 정식 발족하였다. 1월 11일 선거관리위원회에 국민의당 당명을 등록하였다. 그리고 2월 2일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어 안철수, 천정배 의원을 공동대표로 선출하고 공식 출범하였다. (안철수 - 상임공동대표, 천정배 - 공동대표)

2016년 3월 당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통합"을 하자는 식의 발언을 하자, 김한길, 천정배 등은 통합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안철수는 야권통합은 없다면서 통합 제의를 거부하였고, 결국 통합은 무산되었다.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선거 전 여론조사와 달리 38석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고, 16년 만에 여소야대, 20년 만에 3당 체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하지만 호남에서의 큰 성과와 달리 나머지 지역에서는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한계이다.

이후 4·13 총선 당시 같은 당 박선숙, 김수민 의원이 연루된 선거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 사건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하였다.
===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
2017년 3월 20일, 서울 종로구 마이크임펙트 스퀘어에서 "공정·자유·책임·평화·미래의 가치를 수호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제19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후 치러진 당내 경선에서 손학규, 박주선과 겨루어 국민의당 제19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선 후보 선출 직후 지지율이 급상승하여 각종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한 자리수 차이를 보이면서 양강 구도가 형성되었으나, 이후 단설유치원 발언 논란, TV토론에서의 부진[95] 등으로 인해 계속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결국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21.4%를 득표하여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 이은 3위로 낙선하였다.

5.8. 대국민 사과와 당대표 당선[편집]

지난 제19대 대선 당시 국민의당 당원 이준서, 이유미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아들 문준용 씨에 대한 입사특혜 의혹 관련 제보 내용을 조작한 혐의가 드러나며 2017년 6월 국민의당 박주선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고, 이후 당시 대선 후보였던 안철수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철수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정치권에서는 안철수의 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예상을 깨고 당대표 출마를 선언했으며, 8월 27일 서울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당선되었다.

5.9. 바른정당과의 통합 추진[편집]

2017년 10월 안철수는 당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바른정당과의 합당 논의를 본격화하였다. 이후 당대표 재신임을 묻기 위해 전당원투표를 실시하였고, 74.6%의 찬성으로 통합 추진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 반발한 박지원, 유성엽 의원 등 당내 일부 호남 의원들은 탈당하여 민주평화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2018년 2월 11일 치러진 전당원투표에서 73.6%의 찬성으로 바른정당과의 합당이 가결됨에 따라 바른미래당이 창당되었고, 안철수는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5.10. 서울특별시장 낙선[편집]

2018년 4월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민선 7기 서울특별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온종일 초등학교 도입, 서울시 뉴타운 준공영개발 추진, 서울 전철 57 km 구간 전면 지화화 등 다양한 공약을 내걸었으나,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에 이어 이번에도 3위로 낙선하게 되었다. 이번 패배로 큰 타격을 입어 정계에 입문한 지 5년 9개월 만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5.11. 국민의당 창당[편집]

2020년 2월 안철수를 주축으로 하는 국민의당을 창당했으며 초대 대표가 되었다. 21대 총선에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2021년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할 것을 발표했다. 이후 금태섭과의 제3지대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했다. 3월 23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었다.

5.12. 제21대 국회의원[편집]

21대 국회의원 재직 중 2023년 무차별 흉기 난동이 발생하자, 예방책으로 정기건강검진에 정신건강검진을 포함하는 안을 주장했다. 2023년 8월 6일 안철수는 페이스북에 “정부·여당이 ‘가석방 없는 종신형’ 등 강력한 처벌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처벌은 사고와 피해자가 발생한 후의 범죄자에 대한 징벌일 뿐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바로 내년인 2024년부터 2년에 1회씩,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실시하는 정기건강검진에 정신건강검진을 필수검진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게시했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