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문서의 이전 버전(에 수정)을 보고 있습니다. 최신 버전으로 이동
분류
대한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李完用[1] | Ye Wanyong
파일:이완용 사진.jpg
출생
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
(現 경기도 성나시 분당구 백현동 558)
사망
1926년 2월 11일 (향년 67세)
(사망 100주기)
경기도 경성부 옥인동
묘소
없음
국적
본관
우봉 이씨 (牛峰 李氏)
가족
아버지 이석준[친부], 이호준[양부]
어머니 신씨[친모], 민씨[양모]
친형 이면용, 의붓형 이윤용
배우자 양주 조씨
장남 이승구, 차남 이항구
종교
유교 (성리학)
직업
총리
재임기간
1907년 6월 14일 ~ 1910년 8월 29일
제2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1912년 8월 9일 ~ 1926년 2월 11일
정당
1. 개요2. 상세3. 생애4. 사망5. 묘소6.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관료, 사상가, 정치인이다.

2. 상세[편집]

을사늑약, 기유각서, 정미 7조약,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을 포함한 주요 친일파 및 매국노로 평가된다. 이완용 후작에 대한 평가는 나뉘지만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국가권력자 이완용 후작의 손아귀에 있었다. 본관은 우봉, 자는 경덕, 호는 일당이다. 창씨명은 리노이에 간요이며, 작위는 후작이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고 내각총리대신에 올랐으며,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다.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일제에 사법권을 넘기고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르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내선일체 관련 정책에 찬동하여 전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강제하였다.

3. 생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이완용/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망[편집]

5. 묘소[편집]

이완용은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으나,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 및 방치되다가 1979년 직계 후손들에 의하여 화장되었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창씨개명으로 등록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完用). 성인 '이(李)'를 리노이에(李家)로 바꾸었다. 또 이름인 '완용(完用)'을 일본 한자음으로 읽었다.[친부] [양부] [친모] [양모] [6] 1898년 7월 11일 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