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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2년 7월 10일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 벽천리 | |
사망 | 2026년 1월 25일 (향년 73세) |
베트남 호찌민시 떰아인 종합병원 | |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산울동 은하수공원 봉안당 |
사저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51-4 |
본관 | 전주 이씨 |
국적 | |
학력 | |
가족 | 아버지 이인용, 어머니 박양순 형 이해진, 이해명 누나 이해옥, 이해숙 남동생 이해만, 미상 배우자 김정옥 딸 이현주 |
병역 | 병적제적 |
재임기간 | 초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조순 시정) |
1995년 7월 1일 ~ 1995년 12월 26일 | |
제38대 교육부장관 | |
1998년 3월 3일 ~ 1999년 5월 24일 | |
제36대 국무총리 | |
2004년 6월 30일 ~ 2006년 3월 15일 | |
제21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 |
정당 | |
의원 선수 | 7선 (13대~17대, 19대, 20대)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3. 생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이해찬/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망[편집]
2026년 1월 23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베트남 호찌민시 출장 중 호흡곤란과 심근경색으로 응급실로 이송돼 스텐트 시술 후에 호흡이 돌아왔지만 위독한 상태라고 전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위중한 상황을 감안해 조정식 정무특보를 현지에 급파했다. 더불어 민주당에서도 김태년·이재정·이해식·최민희 의원 등이 베트남을 찾아 이해찬 전 의원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했다. 베트남 현지에서 치료 중 1월 25일 오후 2시 48분에 사망했다. 고인은 1월 26일 오후 11시 50분에 출발한 대한항공 비행편을 통해 인천국제공항으로 운구되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에 설치되었다.
5. 수상[편집]
- 환경기자클럽 올해의환경인상
- 환경운동연합 녹색정치인상
- 1996년 6월 13일 황조근정훈장
- 2003년 청조근정훈장
- 2002년 7월 명예제주도민증(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제정 공로)
- 2018년 제20회 백봉신사상 신사의원 베스트 10
- 2026년 1월 2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6. 저서[편집]
- 1988년《광주민주항쟁》, 돌베개, (공저),1988
- 1989년 《민주와 통일의 길목에서》, 함께사는 세상,《열두 편의 가슴시린 편지》, 행복공작소, (공저)
- 2005년《청양 이 면장 댁 셋째 아들 이해찬》, 푸른나무
- 2007년《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오마이북, (공저)
- 2010년《광장에서 길을 묻다》, 동녁, (공저)
7. 소속 정당[편집]
소속 | 기간 | 비고 |
1988 ~ 1991 | 정계 입문 | |
1991 | 당명 변경 | |
1991 | 탈당 | |
1991 ~ 1995 | 복당 | |
1995 | 탈당 | |
새정치국민회의 | 1995 ~ 2000 | 창당 |
새천년민주당 | 2000 ~ 2003 | 합당 |
2003 | 탈당 | |
열린우리당 | 2003 ~ 2007 | 창당 |
대통합민주신당 | 2007 ~ 2008 | 합당 |
2008 ~ 2011 | 탈당 | |
2011 | 창당 | |
민주통합당 | 2011 ~ 2013 | 합당 |
민주당 | 2013 ~ 2014 | 당명 변경 |
새정치민주연합 | 2014 ~ 2015 | 합당 |
2015 ~ 2016 | 당명 변경 | |
2016 | 탈당 | |
2016 ~ 2026 | 복당 외[2] |
8. 평가[편집]
이해찬이 국무총리 시절 독자적인 리더십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해찬은 국무총리 시절 자기 주관과 소신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다른 노선을 밟았다거나 총리로서 독자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평가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이해찬 역시 "대통령의 정견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는 총리의 속성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대입 체제를 개혁한다고 내놓은 2002학년도 수능 시험에서 학생들의 신세를 망쳤다는 비판도 있다. 즐기는 교육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1년 12달을 놀고 지내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교육부 장관의 말만 믿고 따랐던 탓"라는 것이다.
대입 체제를 개혁한다고 내놓은 2002학년도 수능 시험에서 학생들의 신세를 망쳤다는 비판도 있다. 즐기는 교육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1년 12달을 놀고 지내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교육부 장관의 말만 믿고 따랐던 탓"라는 것이다.
9.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이해찬/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여담[편집]
-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내며 교육개혁을 강하게 추진했다. 특히 7차 교육과정, 수능·입시 제도 개편 등 굵직한 정책에 깊이 관여해 ‘교육통’ 정치인으로 불렸고, 지지와 반발을 동시에 많이 받았다.
- 평소 화법이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인 편이라, 농담이나 사석 발언이 논란으로 번진 경우도 많았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솔직하다”는 평가가, 반대 진영에서는 “경솔하다”는 비판이 동시에 따라다녔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이 깊어 여권 내에서 상징성이 컸다. 특히 2018년 민주당 대표 시절에는 당 장악력이 강해 “당을 가장 세게 끌고 간 대표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7선 국회의원을 지낸 만큼 선거·당 운영·국회 관행에 매우 능숙했습니다. 여의도에서는 “이해찬이 움직이면 이유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략가 이미지가 강했다.
- 공식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민주당 내부에서는 여전히 상징적인 인물로 언급된다. 특히 당 위기 상황이 오면 “이해찬이 한마디 하면 판이 달라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
11.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