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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Malaysia
파일:말레이시아 국기.jpg
파일:말레이시아 국장.png
국기
국장
Bersekutu Bertambah Mutu
단결은 힘
국가 정보
국명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독립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
언어
말레이시아어
면적
3,302만 4,100㏊ (67위)
인구
3,430만 8,525명 (46위)
국교
이슬람교
종교
이슬람교 63.5%
불교 18.7%기독교 9.1%
힌두교 6.1%
기타 0.9%
불명 1.8%
상징
국기
국가
Negaraku
국화
부상화
국조
코뿔새
정치
정치체제
군주제, 입헌제, 연방제, 양원제, 내각제
양 디페르투안 아공[1]
압둘라 이브니 아흐맛샤
총리
안와르 이브라힘
외교
가입 국제기구
주한 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97 포 시즌스 호텔 서울 11층
국가 코드
458, MY, MYS
국제 전화
+60
여행경보
사바주 동부도서 지역 및 동부해안을 제외한 전 지역 여행유의
1. 개요2. 상세3. 역사4. 자연환경
4.1. 기후4.2. 지형4.3. 생태계
5. 인문환경
5.1. 언어5.2. 교육5.3. 종교
6. 경제
6.1. 통화6.2. 산업
7. 교통
7.1. 철도7.2. 도로7.3. 항공
8. 인권9. 지방색10. 문화
10.1. 요리10.2. 언론10.3. 스포츠
11. 정치12. 대외 관계
12.1. 아시아12.2. 오세아니아
13.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연방제 입헌 군주국이다. 말레이시아는 13개의 주와 3개의 연방 직할구로 구성되어 있고, 남중국해로 나뉜 말레이반도 지역과 보르네오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국,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해상 국경은 싱가포르와 베트남, 필리핀과 맞대고 있다.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이지만, 연방정부는 푸트라자야에 있다. 그리고 다리를 통해 싱가포르와 연결된다.

2. 상세[편집]

말레이시아의 역사는 18세기부터 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된 말레이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은 해협식민지로 불리었고, 다른 곳들은 보호령이 되었다. 1946년 말레이반도의 주들이 연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세웠고, 1948년 연합을 재편성하여 말라야 연방이 설립되었다.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되었으며, 1963년 9월 16일 말라야 연방은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와 연합하면서 Malaya란 이름에 si를 추가해 Malaysia가 되었다. 그러나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 싱가포르는 정부와의 마찰로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었다.[3] 말레이시아는 독립 이후 아시아에서 최고의 경제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50년동안의 GDP 성장률이 평균 6.5%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천연 자원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과학, 관광, 무역, 의료관광 등의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입헌군주국이며, 국가 원수인 군주(국왕)은 9개 주에 있는 술탄에 의하여 5년에 한 번씩(단, 궐위가 있을 경우에는 예외) 호선으로 선출한다.[4] 군주의 칭호는 양디-퍼르투안 아공이며, 지금 군주는 파항주의 술탄 압둘라이다. 정부의 장은 수상이다. 정부체제는 웨스트민스터 체제에 가깝고, 법체계는 영국의 법에 기초한다. 말레이시아는 민족과 문화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국교는 이슬람교이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는 유라시아 본토의 최남단 지역인 탄중피아이가 있고,[5] 적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열대 기후의 국가이다. 다양한 동식물군이 있어 생물 다양성이 큰 국가이다. ASEAN, 이슬람 회의 기구의 창립멤버이며, APEC, 영국연방, 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이다.

3. 역사[편집]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지도자였던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이 초대 총리가 되었으며, 느그리슴빌란 주의 최고지도자(Yang di-Pertuan Besar; 종종 '술탄'으로 간주됨)였던 투앙쿠 압둘 라만(Tuanku Abdul Rahman)이 초대 국왕이 되었다. 말라야 인들의 소원이었던 독립을 쟁취했으나, 갈 길은 멀고 험난했다. 나라 안은 말레이인과 중국인 등 민족간의 갈등이 심했고, 말라야 연방 홀로는 국제 사회에 나설 수 없었다. 또한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될 만한 자원이 부족했고, 원주민의 수가 부족하여 말레이인들을 우대하는 데 크게 불리했다. 마침 영국의 또다른 식민지였던 북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 브루나이에서도 독립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말라야 연방 정부는 이 지역에 자국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당초 브루나이가 먼저 동의함으로써 1961년 말라야 연방의 가입했으나, 석유라는 최고의 경제적 조건을 갖춘 브루나이는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쇠퇴할 것을 우려, 1년만에 탈퇴했다. 한편 북보르네오(사바), 사라왁, 싱가포르는 당초 이를 고사했으나, 싱가포르가 가입을 결정했고, 싱가포르와 깊은 인연이 있던 북보르네오와 사라왁도 가입을 결정했다. 1963년 세 나라 모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9월 16일 현재의 말레이시아 연방을 성립하였다.

1963년 9월 16일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가 말레이시아를 결성했다. 2년 뒤 싱가포르가 탈퇴하여 현재의 말레이시아로 지속되고 있다. 현재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으로 구성된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10개 회원국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4. 자연환경[편집]

말레이시아의 지리적 위치는 동남아시아 저위도지역으로 열대 우림 기후에 속한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반도의 일부로 이루어진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와 보르네오섬의 일부로 이루어진 동말레이시아로 이루어져 있다.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는 북쪽으로 태국, 남쪽으로 싱가포르, 서쪽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과 인접해 있으며, 동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 브루나이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4.1. 기후[편집]

말레이시아는 적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일년 내내 비가 많이 오고 덥고 습한 열대 우림 기후를 나타낸다. 연간 평균 강수량은 2500 mm에 달한다. 연평균 기온은 32 °C이다.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는 대륙의 영향을 받아 계절간 강수량에 차이가 있고, 동말레이시아는 엘리뇨의 영향을 받을 때 강수량이 줄어든다.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기도 하다.

말레이시아에는 두 종류의 계절풍이 불어온다. 5월에서 9월까지는 남서계절풍이 불어오고 10월에서 4월까지는 북동계절풍이 부는데, 북동계절풍이 불 때 더 많은 비가 내린다. 두 계절풍 기간 사이에 약간이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일년 내내 비가 많이 내린다. 1992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200일 동안 비가 내렸고, 사바주의 코타키나발루에서는 153일, 사라왁주의 쿠칭에서는 253일 동안 비가 내렸다.

4.2. 지형[편집]

말레이시아는 순다판에 놓여 있다. 기반암은 일반적으로 고생대 시기에 형성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퇴적암이다. 가장 오래된 암석의 형성시기는 약 5억 4천만 년 정도이다. 석회암은 물에 녹기 때문에 동굴이 만들어지는데, 보르네오 섬의 구능물루 국립공원에 위치한 물루산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동굴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말레이시아의 총 면적은 약 329,750 km2로 한반도의 1.5 배 가량이다. 영토 크기의 순위는 세계에서 67번째가 된다. 해안선은 총 4,675km로 말레이 반도 쪽이 2,068km,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 쪽은 2,607km이며, 세계에서 29번째로 해안선이 긴 나라이다.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를 이루는 말레이시아 반도는 말레이반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북의 길이는 약 740km, 동서의 최대 폭은 약 322km이다. 말레이시아의 공식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와 행정 수도인 푸트라자야는 모두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에 있다. 보르네오 섬 북부에 있는 동말레이시아에 있는 대도시로는 쿠칭과 코타키나발루가 있다.
  • 산맥 : 말레이시아의 가장 높은 산맥은 보르네오 섬 북동부 사바주에 있는 크로커 산맥으로 가장 높은 산인 키나발루산의 높이는 4,096 m이다. 키나발루 산을 포함하는 키나발루 국립공원은 2000년 UNESCO의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말레이시아 반도에는 수 개의 산맥이 남북을 가로지르며 솟아있다. 가장 큰 산맥은 티티왕사산맥으로 태국 남단에서 시작하여 반도 전체를 가로질러 서남 해안까지 이어진다. 티티왕사 산맥의 가장 높은 산은 코르부산으로 높이는 2,183 m이다.
  • 숲 : 말레이시아의 숲은 대부분 열대 우림으로 말레이시아 반도의 58.2%가 열대 우림으로 덮여 있다. 보르네오 섬 역시 대표적인 열대 우림 지역으로 보르네오 저지대 우림에는 1 ha 당 서로 다른 240 종 이상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열대 우림의 주요 수종은 딥테로카르푸스과에 속하는 나무로 보르네오 섬에 자생하는 것으로는 155종의 딥테로카르푸스과 나무가 보고되어 있다. 한편, 해안가에는 홍수림이 발달하여 있으며, 저지대 곳곳에 늪이 형성되어 있다. 보르네오 섬 사라왁주에 있는 구능물루 국립공원은 열대 우림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되었으며, 2000년 UNESCO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동굴 : 말레이시아 반도에도 여러 개의 동굴이 있지만, 카르스트 지형인 동말레이시아 지역엔 수 많은 동굴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물루 동굴, 사라왁 동굴 등이 유명하다.

4.3. 생태계[편집]

말레이시아는 생물 다양성이 매우 높은 나라이다. 열대 우림과 홍수림에는 수 많은 동식물이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라플레시아는 말레이반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이다. 고양이과 맹수인 인도차이나호랑이, 말레이호랑이, 인도차이나표범, 구름표범 등이 말레이시아 반도의 최상위 포식자로서 서식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남아시아의 호랑이 아종들은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1990년에서 2010년 사이 약 192만 헥타르에 달하는 말레이시아의 숲이 여러 가지 이유로 벌채되었다. 이는 말레이시아 숲의 8.2%에 달하는 면적이다.

5. 인문환경[편집]

온건주의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 등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 사는 다민족 국가이다. 최근 저렴한 물가 등으로 외국인들의 대표적인 유학 장소로 꼽히고 있으며, 임금 및 근로환경이 양호해 해외 노동자들, 특히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진출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 뒤에는 심각한 분열과 인권 탄압이 숨어져 있다.

5.1. 언어[편집]

말레이시아의 공용어는 말레이시아어(Bahasa Malaysia)이며,[86] 이는 말레이어가 표준화된 형태이다. 정부 정책에 따른 전문용어는 말레이시아어이나, 법률적으로는 공용어를 말레이어라고 한다. 말레이시아어는 말레이시아의 공용어로,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내의 논부미푸트라(Non-Bumiputera)들도 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일부는 이를 구사하지 못한다. 말레이어의 또 다른 표준인 인도네시아어와 매우 흡사하여 의사소통에도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다만, kantor, mampir, apotek, karcis, akuntabel 등 말레이시아에서 사용되는 단어와 비슷도 하지 않은 단어들을 사용할 경우 큰 지장이 생길 수 있다). 본래 말레이어의 철자법은 영국이 정한 걸 개정한 자아바(Za'aba)였으나, 네덜란드식 철자법을 개정한 수완디(Soewandi)를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와 마찰을 일으키자 합의하여 완전한 철자법(EYD; Ejaan Yang Disempurnakan)을 제정했다. 표준 말레이어는 구 조호르리아우어와 고급 말레이어의 중간 위치를 점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른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 공용어법에 따르면 "말레이어의 문자는 루미(로마 문자)로 한다"고 하지만, 이는 말레이 문자라고 하는 자위(아랍 문자)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상적으로 루미를 훨씬 더 선호하며, 자위는 대개 이슬람교에 관련된 부분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말레이시아인들은 일상적으로 변칙어(broken language) 형태의 말레이어를 사용하며, 이것은 어디나 일상화돼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어디 가냐고 물을 때 주로 'Kau pigi mana?'를 사용하지만, 제대로 된 형태는 'Di manakah (yang) engkau pergi?'이다. 심지어 'yg(원래는 yang)', 'utk(원래는 untuk)', 'm'cri(원래는 mencari)' 등 축약형들까지 널리 사용된다. 정부는 변칙 말레이어의 사용을 배제하고 있지만, 생활에 깊숙히 배어있는 건 물론 광고에서조차 널리 사용되어, 실질적으로 배제할 순 없는 실정이다.

현재는 전 지역에서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지역에 다라 조금씩, 때로는 큰 차이를 보인다. 보르네오 지역(사바, 사라왁, 라부안) 주민들이 사용하는 말레이어와 말라야 지역(쿠알라룸푸르, 슬랑오르 등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사용하는 말레이어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는데, 예를 들어 'a'로 끝나는 단어들은 보르네오 지역에서는 '아' 그대로 발음하지만, 말라야 지역에서는 '으'와 '어'의 중간정도로 발음한다. 또한 '망가진, 훼손된'을 뜻하는 단어인 'rosak'도 보르네오 지역, 특히 사바와 라부안에서는 인도네시아어인 'rusak'에 가깝게 발음한다. 또한 보르네오 지역에서는 말라야 지역에서 사용되지 않는 'anu'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 밖에 클란탄 주에서는 태국어의 영향이 큰 클란탄팟타니어, 또는 클란탄 말레이어를 사용하는데 말레이시아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다. 특히 '먹다'를 뜻하는 'makan'을 'make', '안된다'를 뜻하는 'jangan'을 'jange'라고 하는 등 'an', 'am' 등으로 끝나는 단어를 'e'로 끝낸다.

말레이어 외에도 영어 역시 상업과 공업에서 널리 쓰이며, 말레이시아 학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어 교육을 받는다. 영어는 역사적으로 공용어였지만, 1969년 5·13 사건 이후 말레이어가 두드러졌다.[139] 1967년 공용어법에 따라 영어는 일부 공식적 자리에서 공용어로서의 역할을 하나, 꼭 공용어라 하긴 어렵다. 영어는 대부분의 국민이 제2언어로 사용하며, 사업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은 물론 대학에서도 대개 이 언어 위주로 사용한다.

5.2. 교육[편집]

유아 교육(어린이집, 유치원)은 의무가 아니지만, 초등 교육은 모든 말레이시아인들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초등 교육은 총 6년이며 그 다음에는 중등 교육을 받는데 이 이상은 의무가 아니다. 고등학교가 없는 대신 중학교가 5학년까지 있다. 초등학교는 두 종류로 나뉘는데 말레이어를 쓰는 공립학교와 중국어나 타밀어를 쓰는 문화학교가 있다. 초등 교육은 총 6년이며,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은 UPSR이라는 시험을 보게 된다. 그 뒤 중학교로 배정된다. 중학교도 초등학교와 비슷하게 공립학교와 문화학교 계열로 나뉘나, "문화학교"라는 표현 대신 "자율형 사립 중학교"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중등 교육은 총 5년인데 하급 3년과 상급 2년이 포함된다. 3학년 학생들은 PT3, 5학년 학생들은 SPM(Sijil Pelajaran Malaysia)이라고 불리는 대학 입시 시험을 보게 된다.

대학은 대개 4년이지만, 일부 사립학교들이 시행하고 있는 파운데이션(Foundation)은 정식 과정이 아닌 차에서 3년인 경우가 많으며, 디플로마(Diploma)는 2년이다. 대학교는 공립대와 사립대로 나뉘는데 사립대는 흔히 유니버시티(university)와 컬리지(college)로 나뉜다. 공립대는 9월에 학기가 시작되며, SPM 이후 최소 9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1999년부터 대학 입시 프로그램이 시행됨에 따라 12개월의 대학 입시 프로그램을 거친 학생들은 공립대에 입학할 수 있다. 하지만 비부미푸트라에게는 10%만 열려있어, 실제로 비부미푸트라의 공립대 입학은 어렵다. 뿐만 아니라 공립대 입학 시 부미푸트라에게 가산점을 붙이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비부미푸트라 학생들이 시험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들은 사립대로 주로 간다. 사립대는 1월에 학기가 시작한다는 점 때문에 긴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해외 명문대로 편입되도록 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어 외국인들이 많이 선호한다. 다만 SPM 성적이 3월에 나오는 관계로 다른 성적을 통해 미리 입학시키곤 한다. 물론 불법이다.

5.3. 종교[편집]

말레이시아 헌법에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2010년 인구 주택 총 조사에 따르면, 민족과 종교가 꽤나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인구의 61.3%가 이슬람교를 믿으며, 19.8%가 불교, 9.2%가 기독교, 6.3%가 힌두교, 1.3%가 유교, 도교 등의 전통 중국 종교를 믿는다. 0.7%가 무교이며, 1.4%가 다른 종교를 믿거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수니파와 샤피파가 말레이시아 이슬람의 지배적인 세력이다.

말레이시아 헌법은 "말레이인"을 엄격하게 정의하고 있는데, 주로 무슬림이나, 말레이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나, 말레이 문화를 따르거나,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 살거나 그쪽의 후손인 사람들을 말레이인으로 보고 있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인의 83.6%가 불교도이고, 3.4%가 도교도, 11.1%가 기독교도이며, 풀라우피낭 주에는 휘무슬림(Hui-Muslim)이라고 불리는 중국계 이슬람교도가 소수 존재한다. 인도인의 86.2%가 힌두교도이며 6.0%는 기독교도, 4.1%는 무슬림이다. 비말레이계 부미푸트라 사이에서는 기독교도가 46.5%로 매우 두드러졌으며, 40.4%는 이슬람교를 믿는다.

무슬림들은 종교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의무적으로 샤리아 법원에 문제를 맡겨야 한다. 이슬람 판사들은 말레이시아의 주요 마다브인 샤피이슬람법학교의 규율을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샤리아 법원의 사법권은 무슬림들의 결혼, 상속, 이혼, 배교, 개종, 양육권 등의 문제에 제한되어 있다. 기타 범죄 또는 민사위반죄 등의 사법권은 없으며, 이는 시민재판소에도 없다. 대법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시민 법원은 종교적 문제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사회적으로 우대받으며, 같은 부미푸트라라도 무슬림 부미푸트라가 비무슬림 부미푸트라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다. 예를 들어, 공립 대학교에 입학할 때 무슬림들은 가산점을 받아, 성적이 비록 낮게 나오더라도 입학하거나, 시험에서 쉽게 합격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보다 성적이 높게 나온 비무슬림들이 시험이나 입학 과정에서 탈락하여, 무슬림 혜택은 종종 종교차별이라고 비판받는다. 또한 비무슬림이 무슬림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다고 판단되거나, 무슬림처럼 행동하는 행위(예: 꾸란이나 샤하다가 적힌 옷을 입는 것, 무슬림들에게 무슬림식 인사를 하는 것, 무슬림들에게만 허락된 행위를 하는 것)는 무슬림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판단하여 처벌을 받을 수 있으며, 실제로 대한민국의 가수 그룹 B1A4는 무슬림들의 허락을 받고 그들과 같이 퍼포먼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아 처벌을 받을 뻔한 적도 있었다. 또한 무슬림들을 상대로 한 선교활동은 금물이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온건한 편이며, 오히려 이슬람 과격주의, 원리주의, 테러주의 따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슬람을 위한 모스크, 불교 신도를 위한 사찰, 힌두교의 힌두 사원, 그리고 교회와 성당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음은 물론 각 종교의 축제마다 타종교인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함께 초대하여 즐기는 ‘오픈 하우스(Open House)’라는 행사를 개최한다. 종교 관련 축제 시기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말레이시아 특유의 성숙된 관용의 문화를 실제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와 술을 먹지 않지만 라마단 기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6. 경제[편집]

주로 주석, 팜유, 석유를 생산.수출하며, 제조업과 관광업을 주요 산업기반으로 삼고 있다. 1981년 부터 마하티르 빈 모하맛 당시 총리의 활발한 지도력 아래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의 소위 "호랑이 국가"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전 세계 공급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이 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자체적으로 극복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1998년 9월 초 환율을 고정시키는 조처와 함께 자본통제에 들어갔다. 자기나라 통화인 링깃화의 달러화 환전을 못하게 하고, 나라 밖에 있는 링깃화는 2달 안에 모두 국내로 갖고 들어오도록 하여, 외국에 그냥 놔 둔 링깃화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또 국내 증권을 산 외국인이 그 증권을 다시 팔려면 1년을 기다리도록 했다. 자본통제는 국내경제를 해외 금융·외환시장과 차단한 뒤 경기부양 정책을 펴기 위한 사전조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런 조처 뒤 통화량 확대공급, 금리인하, 공공지출 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기부양 정책들을 단계적으로 취해 나갔다.

IMF의 통계에 의하면, 말레이시아의 2008년 국내총생산(GDP)은 2216.06억 달러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대부터 고무의 플렌테이션과 주석의 채굴, 천연가스의 채굴 등 특정한 농작물과 광물의 생산이 번성하였으나, 마하티르 빈 모하맛 전 총리가 내세웠던 "와와산 (말레이어로 비젼의 뜻) 2020"(비젼 2020, Vision 2020) 정책에 따라, 종래의 농작물과 광산물의 수출, 관광업에 의존하였던 체질로부터 탈피하여 2020년까지 말레이시아의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6.1. 통화[편집]

말레이시아의 통화 단위는 말레이시아 링깃(RM)으로, 1링깃은 약 325원 정도이다. 보조통화는 센(SEN)이라고 하며, 1링깃은 100센에 해당한다. 지폐는 100링깃, 50링깃, 20링깃, 10링깃, 5링깃, 1링깃의 6종류가 있고, 동전은 50센, 20센, 10센, 5센, 1센의 5종류가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공항이나 시중 은행, 호텔, 환전소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생수 500ml의 경우 약 1링깃(400원 정도), 택시의 기본 요금은 3링깃(1200원 정도)이다.

6.2. 산업[편집]

경제는 전적으로 농업, 광업 등 1·2차 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최대 주석, 천연 고무, 팜유 생산국으로 1960년대 만 해도 주요수출품이 주석과 팜유였다. 이후 정부의 강력한 경제정책으로 말레이시아는 동남아국가 중 3번째로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되었으며, 주요 산업도 관광업과 제조업으로 전환되었다. 농업에 있어서는 주산물이 쌀, 고무, 코프라 등이다. 쌀은 국민의 주식이지만, 쌀 자급률이 30%에 불과해, 자급자족하지 않고 매년 다량의 쌀을 수입한다. 따라서 정부는 관개사업 실시, 벼의 품종 개량 등을 통해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최대의 고무 생산국으로, 수출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합성고무의 발달, 고무 농원 노동자 등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외에도 열대과일 재배, 도시근교 채소, 원예농업이 발달되어 있다. 광업에서는 주석광(錫鑛)과 철광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말레이시아는 세계 최대 주석 생산국으로 주석광은 서해안 몬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충적토를 준설(浚渫)하여 채굴하며 주석을 가공하는 산업이 발달되어있다. 철광은 동해안에 있으며 그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된다. 그리고 석유산업도 사라와크 주에서 소량 산출되었으나, 그 후 사바주·사라왁주에서 대규모 해양유전이 개발되면서 석유채취, 가공산업도 주요산업이 되었다. 그러나 정제기술이 발달되어있지 않은 관계로 석유는 산유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석유 고갈에 대비해 대규모의 유전은 하지 않고 있다. 제조업은 1970년대 말부터 개발하기 시작해 지금은 동남아시아에서 제조업이 발달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주로 전기·통신기계와 수송기계 생산을 하고 수출을 하고 있다. 그리고 관광업도 이 나라의 주 수입원이다. 고무, 주석광, 철광석은 수출하며 식량과 공업제품을 수입한다. 따라서 경제는 고무, 주석, 철의 국제가격의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약간의 1차 산품만을 생산하는 산업구조는 식민지 경제의 유산이다. 이 외에도 말레이시아산 저가 과자의 수출도 활발하다.

7. 교통[편집]

육상교통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잘 발달해 있다. 모노레일도 운행 하고 있으며 특히 서해안을 따라 포장도로와 철도가 잘 정비되어 있다.[85] 말레이시아의 도로망은 98,721km에 달한다. 그 중 1,821km는 고속도로이다. 차량은 좌측통행을 한다. 또한 반도와 섬으로 이루어진 넓은 국토의 영향으로 국내선을 포함한 항공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7.1. 철도[편집]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말레이 철도의 노선망이 있다. 일반 철도(고속 철도 포함), 지하철(MRT), 경전철(LRT), 모노레일 그리고 케이블 카가 있다. 일반 철도는 대부분 도시간 승객 수송과 화물 운송, 그리고 일부 시내 대중교통으로 사용된다. 긴 반도의 서해안 끝의 조호르바루(Johor Bahru)에서 태국 접경의 파당브사르(Padang Besar)까지 서해안 950km를 연결하고 있으며 동해안선은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은 게마스에서 태국 동해안쪽 접경 툰팟까지 528km를 잇고 있다. 서해안선과 동해안선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의 고산지대와 열대우림지대를 버스가 연결시켜 주고 있다. 경전철은 시내 대중교통이나 공항 내 청사 간의 승객 수송과 같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된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과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잇는 고속철도 노선도 있다. 이 노선에는 2가지 열차편이 운행 중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유일한 모노레일 노선은 쿠알라룸푸르의 대중교통으로 이용되는 것이고, 유일한 케이블 카는 피낭에 있다. 쿠알라룸푸르 주변에는 모노레일을 위시한 각종 통근 철도가 발달해 있다. 자동차는 약 900만대이며 인구 3명당 1대이다.

7.2. 도로[편집]

영국의 식민 통치 시기부터 도로가 정비되어 왔다.

7.3. 항공[편집]

말레이시아 항공과 에어아시아 등에서 국내외 항로에 취항하고 있다. 특히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은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항로의 주요 경유지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 파이어플라이 항공이 합세하였다.

8. 인권[편집]

말레이시아는 오랫동안 반대파 억압, 불법 투옥, 심문, 고문, 강제처형 등 극단적인 인권 유린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1957년 독립 이후 현재까지 50년 이상 장기 집권 중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은 야권 탄압 등 권위주의 통치로 비판을 받고 있으며, 특히 시위자들에 대한 불법적인 처벌이 가능한 '국가보안법' 및 부미푸트라들을 전적으로 우대하는 식의 인종차별 정책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9. 지방색[편집]

말레이시아는 정치적, 문화적 부분에서 매우 민감한 나라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인들은 자신이 말레이시아인들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말레이시아를 모욕하는 외국인들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나 유럽의 스페인처럼 지역마다 독특한 감정이 매우 심한 편이며, 아직까지 무장 게릴라 따위는 없으나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말레이시아인들은 민족별로 자신의 민족을 가장 최고로 여기는 경향이 세며, 특히 말레이시아의 실질적인 본토이자 구 말라야 연방의 영토였던 말라야 반도 주민들은 아예 자신의 민족이 아니면 아예 "벽을 쌓는" 경우가 매우 크다. 특히 중국인들은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스스로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정치적으로는 말레이인보다 낮은 지위에 있어 말레이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이슬람 주(술탄이 존재하며, 주로 Darul... 하는 주)에서는 더욱 심하며, 특히 클란탄 주가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전반적으로 경제적 수준이 낮은 말레이인들은 경제적 수준이 높은 중국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일각에서는 말레이인들을 중국인들의 '종'으로 보기도 한다. 양대 민족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으며, 때로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1969년의 5·13 사건 이나 1987년의 제거 작전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사라왁, 사바 등 보르네오 지역에서는 덜 심한 편이지만, 반대로 특유의 지역주의가 심한 편이다. 특히 적지 않은 사라왁, 사바인들은 스스로를 '말레이시아인'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사라왁과 사바가 말레이시아와는 전혀 다른 독립국가임을 주장하고 있다. 아직까지 바스크나 아체처럼 무장투쟁은 일어나지 않고 있으나, 최근들어 독립운동이 세지면서 서서히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는 '말레이시아가 우리 지역을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최근 '사바 사라왁이 말레이시아를 떠나다(SSKM)' 등 독립운동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추후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10. 문화[편집]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사회이다. 지역의 전통 문화는 원주민들에게서 내려오며, 후에 인도네시아로부터 이주해 온 말레이인들로부터도 내려온다. 중국 및 인도 문화의 영향력이 상당하며, 이는 해외 무역이 시작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르시아, 아랍, 영국 문화의 영향도 있으며, 정부의 사회계약을 통해 보호받는 소수민족 문화들도 있다.

1971년 정부는 말레이시아 문화에 대해 규정하는 국가문화정책(National Cultural Policy)을 제정했다. 이 정책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문화는 말레이시아 원주민 문화에 기반해야 된다고 하며, 타 문화에서 유입된 적절한 부분을 포함하고 이슬람교가 일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말레이어를 다른 언어보다 더 많이 홍보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조정은 문화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걸 느낀 일부 비말레이인들 사이에서 불만을 일으켰다. 중국인 협회와 인도인 협회는 비민주적인 문화 정책을 비난하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말레이시아와 이웃 나라인 인도네시아 사이에는 종종 문화 분쟁이 일어나곤 한다. 공통적으로 두 나라 다 비슷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고, 여러 전통과 무품들을 공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에서 말레이시아의 국가(國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쟁이 일어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의식이 매우 강하다. 2009년 말레이시아 정부와 인도네시아 정부가 서로 만나서 문화일치 과정에서 일어난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말레이시아만큼 강하진 않지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공유된다.

10.1. 요리[편집]

말레이시아의 요리는 인종만큼이나 다양하다. 주로 주변국이나 주민들의 조상의 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개 말레이, 중국, 인도, 태국, 자바, 수마트라 지역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과거 향료무역의 영향이 크다. 말레이시아의 요리는 싱가포르나 브루나이와 비슷하며, 필리핀 요리와 흡사한 부분도 있다. 지역마다 다양한 요리가 있으며전통과 다른 것도 많다.

때로는 그 원천의 문화와 관계 없는 음식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 내 중국 음식점들은 종종 말레이 음식들을 서빙하기도 한다. 한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요리가 다른 문화의 방식으로 요리되기도 하며, 이는 각 요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더라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음을 보여준다.[159] 쌀은 주식으로 다양한 요리에 사용된다. 향료나 양념은 종종 사용되지만, 실제 매운맛을 내는 편은 아니다.

10.2. 언론[편집]

말레이시아의 주요 신문들은 정부 및 여권연합 소속 정당들의 소유이며, 몇몇은 주요 야당들이 소유하고 있다. 언론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말라야 지역에 기반한 언론들은 보르네오 지역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항들을 내보내며, 종종 말라야의 식민지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언론들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간의 긴장 상태가 심화됨에 따라 더 높은 비난을 받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인을 나쁘게 묘사하기도 한다.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 언론이 있다.

출판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때문에 일부 출판권과 정보 보급이 제약받는다. 과거 정부가 선거 전 야당 신문들을 엄중 단속하려 한 적이 있었다. 2007년 정부관계기관이 모든 민영방송사에 야당 지도자들의 연설을 내보내지 못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으며, 야당인 민주행동당에서 이를 규탄한 적이 있었다. 또한 선거 기간 동안에는 야권 성향의 매체들을 탄압하기도 한다. 사바 주는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 언론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인쇄출판법 같은 관련법들이 언론의 자유를 축소시킨다고 비판을 받는다.

10.3. 스포츠[편집]

말레이시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는 축구, 배드민턴, 필드하키, 볼링, 테니스, 스쿼시, 무술, 승마, 보트타기, 스케이트보드타기이다. 축구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며, 2034년 FIFA 월드컵에 역사상 최초로 참가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배드민턴 경기는 수천명의 관객들을 유혹하며, 1948년 이래 말레이시아는 토머스컵(남자들이 참여하는 세계 배드민턴 선수권 대회)을 개최한 4개국 중 하나가 되었다. 1997년 말레이시아 론볼링 연맹이 등록되었다. 스쿼시는 영국군에 의해 전래되었으며, 1939년 첫 경기가 열렸다. 1972년 6월 25일 말레이시아스쿼시협회가 창설되었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축구연맹에 제의한 상태이다. 2014년 12월 남자 필드하키 국가대표팀이 세계에서 12번째를 기록했다. 제3회 하키 월드컵이 쿠알라룸푸르의 독립광장에서 개최되었으며 10위를 기록했다. 말레이시아에는 포뮬러 원 트랙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스팡 인터내셔널 서킷이다. 1999년 첫 그랑프리 대회를 열었으며 총 310.408km(192.88마일)를 달렸다.

11. 정치[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말레이시아/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대외 관계[편집]

12.1. 아시아[편집]

  • 대한민국 : 대한민국과 말레이시아는 1960년에 수교하였다. 1960년 2월 23일,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2년 5월 콸라룸푸르에 주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관이, 1964년 4월에는 서울에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대한민국의 대(對)말레이시아 수출은 62억7513만USD, 말레이시아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04억6781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말레이시아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21위의 수출국이자 제14위의 수입국이다.[2] 모두 14,409 명(재외국민 14,403 명, 시민권자 6 명)의 한민족들이 말레이시아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3] 말레이시아의 전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우자"는 소위, 향동학습정책(向東學習政策, Look East Policy)을 펼쳤다.[4] 이 정책의 일환으로 말레이시아 정부는 장학생을 대한민국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의 최규하 전 대통령(1979-1980 재직)이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사라왁 주와 북한은 한 협정을 통해 북한 인부들이 사라왁의 탄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5] 이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를 합법적인 고용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정치 사상을 전파하지 않는 한 취업허가서를 발급해주고 국적을 문제삼지 않는다. 범죄인의 대한 미국 인도를 문제로 북한은 말레이시아에 단교를 선언했다. 그러자 말레이시아는 48시간에 내에 나가라는 말로 맞대응하여 국교가 단절되었다.
  • 태국 : 라마 1세(재위 1782년 - 1809년)는 타이 세력을 크게 확장해 말레이반도의 클란탄까지 지배하였다.
  • 싱가포르 : 싱가포르는 1963년 사바, 사라왁과 함께 신설 말레이시아에 가입했으며, 당시에는 싱가포르 주(말레이어: Negeri Singapura)라는 말레이시아의 한 주였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는 말레이시아 정부와 적지 않은 마찰을 빚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인종 문제였다. 싱가포르만 따지고 보면 인구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지만, 말레이시아 전체에서는 말레이인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싱가포르 주의 총리였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내세워, 말레이인을 우대하고 편애했던 툰쿠 압둘 라만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를 비판했다. 1964년 싱가포르에서 인종 폭동이 발생했고, 이후 적지 않은 마찰이 빚어지자 말레이시아 정부는 사실상 싱가포르를 축출했다(그러나 실제로는, 정부의 압력 상황에서 싱가포르가 자발적으로 탈퇴한 것이었다).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독립했다. 양국은 한편으로는 교류도 하면서 어느 정도 괜찮은 관계를 보이는 듯 했으나, 실제로 그 안에는 씻기 어려운 앙금이 있었으며, 심지어 2002년 당시에는 양국 간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관측조차 있었다.[6] 싱가포르는 영토가 너무 작아 간척사업을 통해 영토를 인위적으로 늘렸는데, 이 과정에서 양국의 국경이 되는 조호르 해협에 대한 매립을 논의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6] 당시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가 조호르 해협을 매립하여 각국 선박들의 말레이시아의 탄중플르파스 항 이용을 방해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양국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주변국이나, 싱가포르와 함께 말레이시아에 가입한 사바, 사라왁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리아우 제도(인도네시아가 지배 중) 일대를 두고 분쟁을 일으켰던 것이 싱가포르가 탈퇴하면서, 이 분쟁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로 바뀌었다. 또 다른 관건은 사바, 사라왁을 두고 벌어진 것이었다. 당시 사바의 지도자였던 툰 푸아드 스테픈스는, "우리 사바는 싱가포르 때문에 말레이시아에 가입했다"며 "그러나 싱가포르가 나갔으니, 우리가 왜 말라야와 함께 해야 하는가?"라며 사실상 말레이시아 조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그들의 주장은 즉슨, 그들도 싱가포르처럼 독립했음을 선언한 바였다. 하지만 독립은 승인되지 않았고, 현재까지 말레이시아로 남아있는 과정에서 사바 인에 대한 탄압 등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현재 일부 사바 인들은 "사바와 사라왁이 말레이시아를 떠나다(SSKM)" 등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해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실제로 말레이시아 정부가 스코틀랜드 독립문제처럼 사바의 독립을 허락할 지는 큰 의문이다.
  • 인도네시아 :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문화적, 민족적으로도 공통점이 많은 나라다. 두 나라 다 말레이인, 또는 말레이 계열의 민족들이 대부분이며 언어도 말레이어를 사용하지만, 서구 열강들의 분단으로 인해 서로 다른 생각과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다. 말라야가 1957년 독립한 이후 수하르토는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Raja; 말레이시아에서는 '위대한 말라야'라는 뜻으로 'Melayu Raya'라고 했다)를 주장하며 말라야와 함께 대(大)말레이 국가의 건설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파열음이 생겼고, 말라야가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를 합병한 뒤 '말레이시아'를 건국하려 하자 관계가 틀어져, 결국 위대한 인도네시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인도네시아는 사바를 무력으로 합병하였고, 이에 말레이시아가 군을 보내 사바를 되찾았다. 1960년대 양국간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으며, 1965년 1월 1일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가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으로 선임된데 대하여 항의의 표시로 유엔을 탈퇴한 일도 있었다. 그 후 영토분쟁 등 모든 것이 그나마 해결됐지만, 현재도 양국간의 분쟁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외국인 배척 및 탄압이 심한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한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강제추방, 심문, 고문, 심지어는 강제처형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큰 비난을 받고 있다. 2014년 12월 말레이시아 정부가 자국에 불법체류 중인 인도네시아인 7만명을 추방시켜, 인도네시아 측의 비난을 받았다. 최근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말레이시아 나집 라작 총리를 방문했으며, 조코위는 자국 여성들의 해외 가정부 취업을 즉각 중단시킬 방침이라고 밝혔다.

12.2. 오세아니아[편집]

  • 호주 : 오스트레일리아와 말레이시아는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대륙과 섬, 육지 등을 서로 이어 주는 교통 요충지이다. 영국 연방 회원국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말레이시아 양국은 무역 관계도 매우 높으며 항공편도 많이 운항하는 것으로 보인다. 양국 모두 상주공관(고등판무관 사무소)을 캔버라(말레이시아 측), 쿠알라룸푸르(오스트레일리아 측) 모두 각각 두고 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설치된 다른 도시 소재 영사관들은 퍼스, 멜버른, 시드니에 한하여 설치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1971년 4월 체결된 5개국 방위 협력(해당 문서 보기)을 결성시켜서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이 체결한 방위협력 기구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13. 문서 출처[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한 내용을 알립니다.
[1] 양디-쁘르뚜안 아공(Yang di-Pertuan Agong)은 말레이시아 국왕에 대한 칭호이다. 호칭은 폐하이다. 말레이시아는 입헌 군주제이기 때문에 국가 원수는 국왕이지만,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군주제와 다르게 임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각 주의 이슬람 수장인 술탄이 임명하며, 임기는 5년이다. 단, 뿔라우피낭 주, 믈라카주, 사바주, 사라왁주의 경우, 술탄이 없으므로 임명할 수 없다. 파항주의 압둘라 이브니 아흐맛샤가 2019년 1월 31일에 즉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