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몽골국 Монгол улс | ᠮᠤᠩᠭᠤᠯ ᠤᠯᠤᠰ Mongolia | ||
국기 | 국장 | |
국가 정보 | ||
국명 | 몽골 | |
수도 | 울란바토르 | |
독립 | 1924년 11월 24일 | |
언어 | 몽골어 | |
면적 | 1억 5,641만 1,574.9㏊ (18위) | |
인구 | 344만 7,157명 (132위) | |
종교 | ||
경제개발 수준 | ||
상징 | ||
국기 | ||
국가 | 몽골 국가 (Монгол Улсын төрийн дуулал) | |
정치 | ||
정치체제 | 공화제, 단원제, 이원집정부재, 단일국가 | |
대통령 | 오흐나깅 후렐수흐 | |
총리 | 롭상남스랭 어용에르덴 | |
입법부 | 국가대후랄 | |
집권여당 | 몽골 인민당 | |
외교 | ||
가입 국제기구 | ||
주한 대사관 | 서울특별시 용산구 독서당로 95 | |
국가 코드 | ||
496, MNG, MN | ||
국제 전화 코드 | ||
+976 | ||
여행 경보 | ||
전 지역 여행자제 |
1. 개요[편집]
몽골국, 약칭 몽골은 동아시아의 내륙국이다. 가장 큰 도시는 수도인 울란바토르이고, 정치 체제는 민주 공화국이다. 1991년까지 공산주의 국가였다. 1,564,116km2의 면적이며, 인구는 약 300만 명으로 적다. 중세에 들어서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국했으며, 몽골 제국의 제5대 칸인 쿠빌라이 칸 시절에는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명나라의 공격을 받고 몽골 지역으로 이동하여 국호를 북원으로 하였다. 이후 1688년부터 '외몽골'로 불렸다. 1911년 제1차 혁명을 일으켰으나 1920년 철폐되었고,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21년 제2차 혁명을 일으켜 현재의 형태로 독립하였다.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접하여 있다.
2. 명칭[편집]
몽골의 정식 명칭은 몽골 올스(Монгол Улс) 즉, 몽골국이다. "몽골 올스"에서 "몽골"(Монгол)은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진 부족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민족 이름을 뜻하고 "올스"(Улс)는 몽골어로 "나라" 또는 "국가"를 의미한다. 직역하면 "몽골 민족의 나라"라는 뜻이 된다.
중국을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서는 간혹 몽골을 몽고(蒙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몽골 제국 원나라의 승상 메르키트 토크토아가 편찬을 주도한 요사에는 1차례, 금사에는 36차례, 송사에는 6차례 몽고(蒙古)의 용례가 확인된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대한민국에서도 1980년대까지 몽고라고 불렀다. 그러나 1990년에 대한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한 몽골 정부가 '몽고'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몽골족에게 시달려왔던 중국인들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조합하여 몽골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단어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에 한국어 국명 변경을 요청했다.[3][4] 이에 국립국어원은 1991년 9월 11일에 열린 제1차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를 통해 "'몽고'와 '몽골'이라는 단어를 함께 쓰되 장차 '몽골'로 통일한다."고 결정했다.
중국을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서는 간혹 몽골을 몽고(蒙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몽골 제국 원나라의 승상 메르키트 토크토아가 편찬을 주도한 요사에는 1차례, 금사에는 36차례, 송사에는 6차례 몽고(蒙古)의 용례가 확인된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대한민국에서도 1980년대까지 몽고라고 불렀다. 그러나 1990년에 대한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한 몽골 정부가 '몽고'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몽골족에게 시달려왔던 중국인들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조합하여 몽골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단어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에 한국어 국명 변경을 요청했다.[3][4] 이에 국립국어원은 1991년 9월 11일에 열린 제1차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를 통해 "'몽고'와 '몽골'이라는 단어를 함께 쓰되 장차 '몽골'로 통일한다."고 결정했다.
3. 역사[편집]
고대로부터 몽골 지역은 몽골인이 아닌 흉노, 돌궐 등 튀르크인들이 지배하였다. 흉노와 돌궐 같은 튀르크인 정복자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골로 건너가 동쪽의 몽골인을 정복했기 때문에 몽골에서는 흉노와 돌궐을 몽골의 역사로 배운다. 몽골족의 직계 조상은 몽골 동부 지역에 존재한 동호족 계통인 더더우위, 몽올실위이며 약소국이였던 고대 몽골인들은 사서의 문헌적 기록에서도 몽올실위, 더더우위로서 가끔 기록이 보일 뿐이다. 튀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와 알타이 산맥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현 몽골 동쪽 지역에 존재하던 몽골인들은 정복하면서 원시 몽골인들은 튀르크인들의 지배하에 언어적으로도 튀르크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몽골의 직계 조상인 몽올실위와 더더우위는 고구려와 돌궐에 조공을 보냈다. 고구려가 만주 지역을 정복하면서 많은 몽골계통 민족들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계통이 불분명한 거란 또한 고구려의 지배 하에 존재하였다. 최근 몽골 다리강가에 고구려의 성벽과 고분이 발견되어 고구려인들이 몽골 동부 지역의 몽골인들도 지배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고구려는 전성기 시절 아시아 동북부를 전부 삼켰기 때문에 많은 몽골인들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많은 문헌의 관점에서도 몽골이라는 이름은 보이는 것은 원조비사에 나오는 몽올실위와 연관성을 보이며, 몽골인은 더더우위와 몽올실위에서 기원한 후계 민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위구르 카간국이 키르기스에 의해 멸망하면서 튀르크인의 지배하에 있던 몽올실위는 독립하였다. 1206년 보르지긴 테무친이 몽골 지역을 통일하고 쿠릴타이에서 칭기즈 칸으로 즉위하면서 국명을 몽골 제국이라고 하였고 이후 대원, 킵차크 칸국 등의 여러 나라들로 분열되면서 14세기 말에 몽골인 제국은 북원 빼고는 전부 현지 세력에 의해 멸망하였고, 청나라는 몽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리시켰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자 외몽골은 기회를 잡고 그 해 12월에 혁명(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았다. 1913년 티베트와 우르가(울란바토르)에서 몽장 조약을 체결하였고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20년에 국민당이 외몽골의 자치를 철폐시켰으나, 그 해에 반중국·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 인민당이 결성되었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혁명군을 조직하여 제2차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몽골은 1924년 11월 26일부터 현재까지 독립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924년 11월 26일에는 정부 형태를 군주제에서 인민 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고,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후 소련의 몽골과 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몽골은 중소 국경 분쟁 발생시 소련을 지원하였다. 1991년 말에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으며, 1992년 2월 13일에 복수 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또한 계획 경제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하였다.
위구르 카간국이 키르기스에 의해 멸망하면서 튀르크인의 지배하에 있던 몽올실위는 독립하였다. 1206년 보르지긴 테무친이 몽골 지역을 통일하고 쿠릴타이에서 칭기즈 칸으로 즉위하면서 국명을 몽골 제국이라고 하였고 이후 대원, 킵차크 칸국 등의 여러 나라들로 분열되면서 14세기 말에 몽골인 제국은 북원 빼고는 전부 현지 세력에 의해 멸망하였고, 청나라는 몽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리시켰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자 외몽골은 기회를 잡고 그 해 12월에 혁명(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았다. 1913년 티베트와 우르가(울란바토르)에서 몽장 조약을 체결하였고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20년에 국민당이 외몽골의 자치를 철폐시켰으나, 그 해에 반중국·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 인민당이 결성되었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혁명군을 조직하여 제2차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몽골은 1924년 11월 26일부터 현재까지 독립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924년 11월 26일에는 정부 형태를 군주제에서 인민 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고,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후 소련의 몽골과 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몽골은 중소 국경 분쟁 발생시 소련을 지원하였다. 1991년 말에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으며, 1992년 2월 13일에 복수 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또한 계획 경제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하였다.
4. 자연환경[편집]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에 속한다. 국토는 4가지 성격의 지대로 나뉜다. 서쪽은 알타이, 항가이라고 하는 큰 산맥, 남쪽은 바위와 모래가 전부인 고비 사막, 동쪽은 아무것도 없는 초원, 그리고 북쪽은 후브스굴호와 사람이 뚫고 지나가기 불가능한 시베리아의 남쪽 산림(타이가)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고도는 평균 1,500m 정도다.
고비사막의 영향을 받아 매우 건조(건조기후)하다. 일년 평균 강수량이 388mm 정도다. 고비사막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중국, 한국의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고비사막의 영향을 받아 매우 건조(건조기후)하다. 일년 평균 강수량이 388mm 정도다. 고비사막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중국, 한국의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5. 인문환경[편집]
5.1. 언어[편집]
몽골어가 공용어다. 러시아어는 공산주의 시절에 제2국어 수준으로 널리 가르쳤던 언어였다. 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줄었지만, 2007년에 블라디미르 푸틴이 몽골을 방문한 이후, 다시 중요한 언어로 각광받고 있다. 서쪽에는 소수의 카자흐족들이 카자흐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과의 활발한 외교관계의 영향으로 한국어, 일본어를 배우는 몽골인들도 존재해 있으나, 지리적으로는 중국과 가까우므로 중국어도 필수 과목으로서 가르치기도 했다.
몽골어는 알타이제어의 하나로 넓은 뜻으로는 몽골민족이 과거에 사용했고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몽골계 언어 전반을 가리킨다. 좁은 뜻으로는 위구르계 몽골문자로 쓰인 몽골어 문어를 뜻한다.
현재 몽골어는 키릴 문자를 주로 사용한다.
몽골어는 알타이제어의 하나로 넓은 뜻으로는 몽골민족이 과거에 사용했고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몽골계 언어 전반을 가리킨다. 좁은 뜻으로는 위구르계 몽골문자로 쓰인 몽골어 문어를 뜻한다.
현재 몽골어는 키릴 문자를 주로 사용한다.
5.2. 교통[편집]
몽골 횡단 철도(The Trans-Mongolian Railway)가 시베리아의 울란우데(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에서 울란바토르를 거쳐 중국의 얼롄하오터 시를 잇고 있다. 얼롄하오터에서는 선로가 바뀌며 베이징까지 잇는다. 이 철도의 몽골 내 노선은 1,110km다. 그 지선 하나는 다르항에서 구리 광산이 있는 에르데네트까지 잇고, 또 다른 지선 하나는 울란바토르에서 구리 광산이 있는 바가누르(몽골어: Багануур)를 잇는다. 그 외에 처이발상 철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접속되어 있다. 몽골정부는 이 두 철도를 연결하는 노선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또한 초이발산과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노선도 추진되고 있다. 몽골 철도의 총 길이는 1,810km이고, 철도 밀도는 11.5km/10,000km2로, 이웃한 중국에 비하여 0.12배에 불과하다. 자동차 도로는 잘 발달되어 국내 항공로와 마찬가지로 각 주에 통해 있다. 국내 항공로는 중국,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다. 몽골의 차량은 약 21만대다.
수도 울란바토르에 몽골 유일의 국제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이 있다.
수도 울란바토르에 몽골 유일의 국제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이 있다.
5.3. 종교[편집]
몽골인의 주된 종교는 티베트 불교로 역사적으로는 티베트와의 관계가 깊다. 하지만 1992년 선거로 민주화된 이후 개신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유입되고 있으며, 그 이전부터 러시아의 영향으로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이 소수 있다. 신앙자 분포(비율)는 불교 53%, 이슬람교 3%, 토속종교 3%, 기독교 2%, 무종교 39%이다.
6. 스포츠[편집]
몽골의 전통 무술 브흐는 몽골의 국기(國技)로 정착되어 있다. 체구가 건장한 청년들은 일본에 가서 스모 선수로 등단하기도 한다.
축구가 인기 있으며 몽골 내셔널 프리미어리그가 운영되고 있다.
축구가 인기 있으며 몽골 내셔널 프리미어리그가 운영되고 있다.
7. 정치[편집]
1924년부터 1991년까지는 소련의 지원을 매우 많이 받은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후 1992년의 선거를 통해 공산주의를 사실상 폐기하였고 대신 민주공화제를 채택, 총리와 대통령의 권한을 나눈 정치제도로 확립된 이원집정부제로 연임이 가능한 4년 임기의 대통령을 국민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8. 행정 구역[편집]
9. 군사[편집]
18세~25세까지의 남자들은 1년간 복무해야 하지만 생업에 종사하거나 학생, 질병이 있는 자 등은 징병이 면제되는데다가 현역복무와 병역세 납부 중 양자택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복무율은 낮다.
몽골에서 병역세는 159만 투그릭(한화 70만원 상당)이며 이 돈을 병역세로 납부하면 병역의 의무가 사라진다.
몽골군은 몽골 국군(육군과 육군항공대가 통합)과 국경수비대, 전투경찰(경찰소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내륙국이라 해군이 없다.). 국방예산은 약 2.2%정도로 세계평균보다 약간 낮다.
몽골에서 병역세는 159만 투그릭(한화 70만원 상당)이며 이 돈을 병역세로 납부하면 병역의 의무가 사라진다.
몽골군은 몽골 국군(육군과 육군항공대가 통합)과 국경수비대, 전투경찰(경찰소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내륙국이라 해군이 없다.). 국방예산은 약 2.2%정도로 세계평균보다 약간 낮다.
10. 대외 관계[편집]
10.1. 대한민국[편집]
몽골은 현재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몽골은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으므로,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과는 미수교 상태였으나, 1990년 3월 26일 옛 공산권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수교하였다. 울란바타르 시내를 달리는 차량의 거의 대부분은 한국산이며, 2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몽골에서 학교, 병원, 기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2만 명 이상의 몽골인들도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특히 최근 대한민국 정부가 수차례 공개적으로 자원 외교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후 대한민국 기업들의 자원 개발 투자가 러시를 이루는데, 가장 대표적인 투자 지역 가운데 하나다. 2011년 8월 22일 대한민국과 몽골의 양국 정상은 양국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에너지·자원 분야의 협력을 대폭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울란바타르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에 주한 대사관이 있다.
그리고 2만 명 이상의 몽골인들도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특히 최근 대한민국 정부가 수차례 공개적으로 자원 외교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후 대한민국 기업들의 자원 개발 투자가 러시를 이루는데, 가장 대표적인 투자 지역 가운데 하나다. 2011년 8월 22일 대한민국과 몽골의 양국 정상은 양국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에너지·자원 분야의 협력을 대폭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울란바타르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에 주한 대사관이 있다.
10.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48년 수교하여 북한과 깊은 관계에 있던 공산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대한민국과의 수교한 후에는 대한민국과도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 관계)
10.3. 중화인민공화국[편집]
러시아에서 10월 혁명(1917)이 일어나자 1920년에 중국이 외몽골의 자치를 철폐시켰으나, 그 해에 反중국·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 인민혁명당이 결성되었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혁명군을 조직하여 제2차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몽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9번째 수교국이나, 중소 국경 분쟁 때문에 난리를 겪기도 했다. 특히 몽골은 구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할 만큼 소비에트연방(소련)과 상당한 친교 관계를 유지했으며,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국경 분쟁에서 구 소련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1980년대 말 소련과 중국 간의 화해로, 중국-몽골의 관계 또한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이래, 중국은 몽골의 최대 교역국이 되었고 수많은 중국 회사들이 몽골 내에서 운영되고 있다. 한편, 내몽골 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이므로 문제점이 많다.
10.4. 러시아[편집]
예로부터, 몽골은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17년 이후 몽골은 러시아 혁명의 여파에 휘말렸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전란을 수습하고 1924년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이라 함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으로 몽골은 정부형태를 군주제에서 인민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당시에 백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을 때, 소비에트 연방이 몽골에 지원을 해주어 백군을 물리쳐 승리를 차지하였기도 하였으며, 이후 몽골은 소련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으며, 중소 국경 분쟁이 발생할 때 소련을 즉시 지원하였다.
몽골은 지금도 러시아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17년 이후 몽골은 러시아 혁명의 여파에 휘말렸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전란을 수습하고 1924년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이라 함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으로 몽골은 정부형태를 군주제에서 인민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당시에 백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을 때, 소비에트 연방이 몽골에 지원을 해주어 백군을 물리쳐 승리를 차지하였기도 하였으며, 이후 몽골은 소련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으며, 중소 국경 분쟁이 발생할 때 소련을 즉시 지원하였다.
몽골은 지금도 러시아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0.5. 헝가리[편집]
헝가리가 벨러 4세의 치하(1235년~70년)이던 1241~42년, 우구데이 칸(재위:1229~41년)이 지휘하는 몽골 제국의 군대는 독일 동부에서 독일의 저항에 부딪히자,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작전 중인 부대에 합류했고, 1241년 4월 헝가리군을 격파한 몽골군은 헝가리에서의 몽골 점령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국토가 황폐화되고, 절대다수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10.6. 미국[편집]
미국은 1960년대 초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몽골과 수교하려고 하였고, 몽골의 유엔 가입 때 중화인민공화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실제 수교는 늦어져서,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과 중앙유럽의 개혁, 개방 시기인 1987년 1월 27일에 미국과 수교에 합의했고 지금도 돈독한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10.7. 일본[편집]
몽골은 당시 원나라 시절에 쿠빌라이 칸이 일본 원정을 고려와 합세하여, 정복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어와 태풍으로 실패하였다.
현대에는 1972년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1987년 몽골 총리가 최초로 일본을 방문했으며, 2010년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Tsakhiagiin Elbegdorj) 몽골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현대에는 1972년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1987년 몽골 총리가 최초로 일본을 방문했으며, 2010년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Tsakhiagiin Elbegdorj) 몽골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10.8. 우크라이나[편집]
몽골은 제국 시절에 오고타이 칸이 서방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 키예프 대공국을 침공하였다. 이로 인해서 키예프 대공국은 몽골 제국에 의해서 붕괴하였고, 주민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붕괴한 뒤에 몽골 제국은 크림 반도 연안에 킵차크 칸국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수 백년간 통치하였다. 후에, 리투아니아가 우크라이나 서부를 몽골 제국으로부터 빼앗자 몽골은 쇠퇴하여 가는 상태에서 우크라이나 서부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역사적인 이유로 그리 관계가 좋지는 않으나, 통상적인 외교는 진행되어 가는 상태이다.
10.9. 영국[편집]
몽골과 영국은 1963년 수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