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920년 2월 25일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現 평안북도 정주시 원봉리) | |
사망 | 2012년 9월 3일 (향년 92세)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로 267-177 | |
묘소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로 324-275, 천정궁박물관 외부 본향원 |
사인 |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 |
국적 | |
학력 | 일본 와세다대학교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공업학과 |
가족 | |
직업 | 종교인, 전 종교기관단체인 |
교파 |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회) |
칭호 | 메시아, 참아버님, 총재, 선생님 |
1. 개요[편집]
문선명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이자 초대 교주다.
2. 상세[편집]
3. 생애[편집]
문선명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남평 문씨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래 이름은 문용명이다. 그는 7남 6녀 중 2남으로 태어났으며, 형 문용수의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종조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문윤국 목사로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그 이후로도 문윤국 목사는 피신을 다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집안재산을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어 가계가 파산하였다.
1938년에는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다니며, 조선예수교회 계열의 명수대예배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 창경원이나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하고, 한인학생회를 통하여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
졸업 후 귀국한 그는 1943년 12월 최선길과 약혼하였고, 1944년 5월 이호빈 목사의 주례하에 결혼하였다. 1944년 3월에는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였다. 1944년 10월에서 1945년 2월 사이에는 경기도경찰부에서 감옥생활을 하며 일본에서의 활동에 대한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1945년 10월에는 금전 문제 때문에 1주일가량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1946년 4월까지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의 문하생으로 약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문선명은 이곳에서 김백문은 계시에 의하여 모든 신자가 보는 앞에서, 전 세계의 솔로몬왕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김백문의 교리가 문선명의 교리보다 먼저 정립이 되었고 문선명의 '창조, 타락, 복귀'도 김백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1946년 가족들을 남한에 남겨둔 채 홀로 신령파 교회를 찾아 월북하여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 그 곳에서 정득은을 만났다. 평양에서 신령파 신도들을 모아 교회를 운영하던 중 사회문란 혐의로 수감되었다. 1946년 6월에는 당시 북한 정부(북조선인민위원회)의 신종교에 대한 탄압정책에 따라서, 종교를 사칭해 사기를 쳤다는 명목으로 허호빈이 적발되었다. 문선명은 허호빈과 관련이 있다는 죄목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남한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간첩혐의가 덧붙여졌다.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뚜렷한 혐의가 나타나지 않아서, 사회질서문란죄로 1946년 8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되었다. 출옥 후 종교활동을 통하여 신도 수가 점차적으로 많아졌으나, 북한의 종교탄압으로 인하여 다시금 간첩 혐의로 1948년 2월부터 5월까지 평양내무서 및 형무소에 수감된다. 5월에는 흥남노무자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 1950년 10월까지 강제노역을 당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흥남에 상륙한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0일간의 평양 귀환 길에 문정빈, 박정화 등 옥중에서 전도한 네 명의 제자가 따라나섰다. 평양에서 다시 40일간 지승도, 옥세현, 정달옥, 김원필 네 명의 제자를 수습하여 평양을 떠난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떠나, 27일에 서울에 도착한다.
1991년 11월 30일 김일성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 문선명 총재 내외를 초청해 북한에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였다.
1970년대의 미국에서의 선교로 기독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 등의 반발이 거세어졌고, 유대인들까지 적대시하였다. 결국 그는 관습에 따른 선교헌금에 대한 이자소득의 세금을 신고하지 않아, 1984년 7월 20일, 미국의 댄버리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문선명 총재는 감형을 받아 13개월 만에 출감했다.
1938년에는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다니며, 조선예수교회 계열의 명수대예배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 창경원이나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하고, 한인학생회를 통하여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
졸업 후 귀국한 그는 1943년 12월 최선길과 약혼하였고, 1944년 5월 이호빈 목사의 주례하에 결혼하였다. 1944년 3월에는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였다. 1944년 10월에서 1945년 2월 사이에는 경기도경찰부에서 감옥생활을 하며 일본에서의 활동에 대한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1945년 10월에는 금전 문제 때문에 1주일가량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1946년 4월까지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의 문하생으로 약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문선명은 이곳에서 김백문은 계시에 의하여 모든 신자가 보는 앞에서, 전 세계의 솔로몬왕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김백문의 교리가 문선명의 교리보다 먼저 정립이 되었고 문선명의 '창조, 타락, 복귀'도 김백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1946년 가족들을 남한에 남겨둔 채 홀로 신령파 교회를 찾아 월북하여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 그 곳에서 정득은을 만났다. 평양에서 신령파 신도들을 모아 교회를 운영하던 중 사회문란 혐의로 수감되었다. 1946년 6월에는 당시 북한 정부(북조선인민위원회)의 신종교에 대한 탄압정책에 따라서, 종교를 사칭해 사기를 쳤다는 명목으로 허호빈이 적발되었다. 문선명은 허호빈과 관련이 있다는 죄목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남한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간첩혐의가 덧붙여졌다.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뚜렷한 혐의가 나타나지 않아서, 사회질서문란죄로 1946년 8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되었다. 출옥 후 종교활동을 통하여 신도 수가 점차적으로 많아졌으나, 북한의 종교탄압으로 인하여 다시금 간첩 혐의로 1948년 2월부터 5월까지 평양내무서 및 형무소에 수감된다. 5월에는 흥남노무자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 1950년 10월까지 강제노역을 당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흥남에 상륙한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0일간의 평양 귀환 길에 문정빈, 박정화 등 옥중에서 전도한 네 명의 제자가 따라나섰다. 평양에서 다시 40일간 지승도, 옥세현, 정달옥, 김원필 네 명의 제자를 수습하여 평양을 떠난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떠나, 27일에 서울에 도착한다.
1991년 11월 30일 김일성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 문선명 총재 내외를 초청해 북한에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였다.
1970년대의 미국에서의 선교로 기독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 등의 반발이 거세어졌고, 유대인들까지 적대시하였다. 결국 그는 관습에 따른 선교헌금에 대한 이자소득의 세금을 신고하지 않아, 1984년 7월 20일, 미국의 댄버리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문선명 총재는 감형을 받아 13개월 만에 출감했다.
4. 사망[편집]
2012년에도 7월 19일 피스컵 개회선언을 하였고 8월 2일 모교인 오산고등학교를 방문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8월 13일 감기와 폐렴 합병증으로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 병세 호전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아 같은 달 31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으로 옮겨졌으며, 2012년 9월 3일 그 곳에서 향년 93세로 사망하였다.
5. 교리[편집]
문선명 총재는 16세가 되던 1935년 부활절에 기도 중 예수로부터 '인류 구원 사업에 대한 엄중한 당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서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 재림주로 믿으며 "참부모님"이라 칭한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기초로 삼는 등 기독교와 유사한 교리를 표방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세부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와는 다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교리는 문선명, 한학자 양위분을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 참부모로 믿고 모시는 것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기본 교리 체계로 원리원본, 원리강의안, 원리강론 등을 낸 바 있으며, 이 중 원리강론은 제자 중 한 사람인 유효원 회장이 집필한 것으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교리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6. 주요 활동[편집]
6.1. 평화[편집]
문선명 총재는 천주평화연합(UPF)이라는 민간기구를 만들어 민간 차원의 세계적인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를 모태로 하여 기존 UN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즉, 현재까지 UN을 이끌어온 국가대표들을 하원으로 설치하고 새롭게 종교계, 문화계, 교육계의 국제적인 지도자들로 구성된 상원을 창설해 이것이 하원을 보완하고 하원이 그것을 존중하고 현실화한다는 방안이다. 이를 통하여, 양원의 상호존중으로 글로벌 이슈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기구는 기존 유엔이 각국 정부 대표들로 구성, 운영되는 데 반해, 192개 유엔 회원국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계 지도자들이 민간인 신분을 유지하면서 자국 대표로 참여하는 범세계적인 민간 기구이다. 이를 통하여, 지역주의와 국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기존 유엔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평화 정착, 분쟁 해결, 빈곤 추방 및 환경 보전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
6.2. 정치[편집]
정치적으로는 대한민국에 평화통일가정당(구 천주평화통일가정당)을 설립하여 지난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 지역구에 국회의원 후보를 내었으나, 의석 확보는 실패하였다. 이후 네팔에서도 같은 이름의 정당을 설립하여, 1명의 당선자를 내었다.
6.3. 경제[편집]
(주)일화 통일중공업(주)(현재 S&T 중공업)[44], 일신석재, 평화자동차 등의 여러 기업을 운영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여 왔다. 특히, 평화자동차는 북한 지역에 자동차 공장을 세워 휘파람이라는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어 남북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평화자동차의 운영권은 북한에 양도되었다.
6.4. 문화예술[편집]
문화예술계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선화예술중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선문대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선문대학교 체육학부 무도학과(격투기학과)에는 프로레슬러였던 故 이왕표가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1981년에는 오! 인천이라는 영화를 촬영했으나 흥행하지 못했다.
1981년에는 오! 인천이라는 영화를 촬영했으나 흥행하지 못했다.
6.5. 교육[편집]
교육계에 있어서는 앞서 언급한 예술학교 뿐만 아니라, 경복초등학교, 선정중학교, 선정고등학교, 선문대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2006년에는 청심국제중학교, 청심국제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미국에서는 UTS(Unification Theology School)를 설립하였으며, 브리지포트 대학을 인수받아 경영하고 있다.
6.6. 스포츠[편집]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여 생전에 대한민국 축구계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성남 일화 천마 축구단과 충남 일화 천마 여자 축구단을 운영했었고 또한 브라질 상파울루의 소로카바라는 프로축구팀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피스컵이라는 국제 클럽 축구 대회도 개최하여 2003년부터 2년 주기로 대회가 열렸으며 2007년 제3회 피스컵까지 열렸다. 1회 대회에 PSV 에인트호번, 2회 때 토트넘 홋스퍼, 3회 때 올림피크 리옹이 우승했다. 2009년 제4회 대회는 스페인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는 올림피크 리옹, 세비야 FC, 리가 데 키토, 유벤투스 FC, FC 포르투, 성남 일화 천마 등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 이어 2006년부터 국제 여자 축구 대회인 피스퀸컵도 2년마다 개최했다.
그러나 문선명 총재의 사후 통일교에서 스포츠계의 지원을 전부 중단하여 충남 일화 천마는 해체하였고 성남 일화 천마는 성남시에서 인수하였다. 피스컵 또한 2012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축구에 애정을 쏟았던 본인(문선명)과 달리 부인 한학자와 통일그룹의 실권을 진 넷째아들 문국진은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이들 중 문국진은 야구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통일그룹은 2010년 넥센 히어로즈 구단 인수설이 있었는데 통일그룹 계열 일화가 넥센 히어로즈와 2010년부터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피스컵이라는 국제 클럽 축구 대회도 개최하여 2003년부터 2년 주기로 대회가 열렸으며 2007년 제3회 피스컵까지 열렸다. 1회 대회에 PSV 에인트호번, 2회 때 토트넘 홋스퍼, 3회 때 올림피크 리옹이 우승했다. 2009년 제4회 대회는 스페인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는 올림피크 리옹, 세비야 FC, 리가 데 키토, 유벤투스 FC, FC 포르투, 성남 일화 천마 등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 이어 2006년부터 국제 여자 축구 대회인 피스퀸컵도 2년마다 개최했다.
그러나 문선명 총재의 사후 통일교에서 스포츠계의 지원을 전부 중단하여 충남 일화 천마는 해체하였고 성남 일화 천마는 성남시에서 인수하였다. 피스컵 또한 2012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축구에 애정을 쏟았던 본인(문선명)과 달리 부인 한학자와 통일그룹의 실권을 진 넷째아들 문국진은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이들 중 문국진은 야구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통일그룹은 2010년 넥센 히어로즈 구단 인수설이 있었는데 통일그룹 계열 일화가 넥센 히어로즈와 2010년부터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7. 21세기 활동[편집]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일대에 1995년부터 천주청평수련원 (현 HJ천주천보수련원),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 천정궁박물관을 세운 데 이어, 200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화교육기관인 청심국제중학교·청심국제고등학교 설립하는 한편, 2012년 무렵에는 여수세계박람회를 유치하기 위한 정부의 기업도시 건설 계획에 참여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일대에 대규모 부지의 매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여수엑스포 유치에 큰 도움을 준 여수 화양지구 해양관광 레저단지 개발이 문선명 총재의 계획하에 (주)일상해양산업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
2008년 7월 19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서 회의를 가진 뒤 그와 그의 일가족과 신도들이 탄 미국 시콜스키사의 당시 미국 대통령 전용헬기 S-92 기종의 헬리콥터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 방면으로 돌아가던 중 악천후 속에 헬기가 장락산 정상 부근에 추락,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선명 총재의 일가족을 비롯하여 승무원까지 탑승자 전원이 무사히 대피했고, 그 후 헬기는 폭발하여 전소되었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6명의 탑승자는 모두 무사하며 중경상을 입은 3명을 제외한 문선명 총재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은 경미한 상해만 입고 전원이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2010년 1월 31일은 문선명 총재의 구순이었다. 이 날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북한의 김정일, 대한민국의 한승수 등이 축하하였다. 특히 김정일은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을 통하여, 산삼 세 뿌리와 함께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 장미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 등을 보내왔다. 2009년 3월 김영사를 통해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가 출간되었다.
2008년 7월 19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서 회의를 가진 뒤 그와 그의 일가족과 신도들이 탄 미국 시콜스키사의 당시 미국 대통령 전용헬기 S-92 기종의 헬리콥터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 방면으로 돌아가던 중 악천후 속에 헬기가 장락산 정상 부근에 추락,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선명 총재의 일가족을 비롯하여 승무원까지 탑승자 전원이 무사히 대피했고, 그 후 헬기는 폭발하여 전소되었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6명의 탑승자는 모두 무사하며 중경상을 입은 3명을 제외한 문선명 총재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은 경미한 상해만 입고 전원이 청심국제병원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2010년 1월 31일은 문선명 총재의 구순이었다. 이 날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북한의 김정일, 대한민국의 한승수 등이 축하하였다. 특히 김정일은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을 통하여, 산삼 세 뿌리와 함께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 장미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 등을 보내왔다. 2009년 3월 김영사를 통해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가 출간되었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아들 문효진, 문흥진, 문현진, 문국진, 문권진, 문영진, 문형진, 문성진, 문희진, 박사무엘/딸 문예진, 문혜진, 문인진, 문은진, 문선진, 문연진, 문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