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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서울大學校 SEOUL NATIONAL UNIVERSITY | ||
분류 | 국립대학법인 종합대학, 4년제 대학 | |
교훈 | 진리는 나의 빛 | |
설립 | 설립국가 | |
개교일 | 1946년 10월 15일 (78주년) | |
위치 | 관악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신림동) |
연건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3 (연건동) | |
시흥 | 경기도 시흥시 서울대학로 173 (배곧동) | |
평창 |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대화면 평창대로 1447 (신리) | |
학교법인 |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 |
이사장 | 제7대 권오현 | |
총장 | 제28대 유홍림 | |
대학병원 | ||
학사 통계 | 학생수 | 21,671명 (2024년 기준) |
평균평점 | 3.64점 (4.3점 만점) | |
경쟁률 | 7.3:1 (3,735명 모집 / 26,724명 지원) | |
취업률 | 70.3% (2023년 기준) | |
대학기관평가인증 인증대학(2024년) |
서울대학교 정문 사진 |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1946년에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한 여러 관·공·사립 전문학교가 통합되면서 국립종합대학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948년에 ‘서울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2011년에는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되었다.
3. 역사[편집]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고종 광무 태황제는 자력 근대화를 위한 교육 사업을 추진하면서 처음으로 여러 근대식 고등 교육 기관을 했다. 1895년 4월 19일, 칙령을 통해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설립됐고, 그해 5월 6일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고 다음해 이준을 포함한 47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법학교(1909년) - 경성전수학교(1911년) - 경성법학전문학교(1922년) -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2018년 2월까지 존속하고 문을 닫는다. 2018년 3월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과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법과대학 석사과정과 박사과정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1895년 5월 10일 소학교 설립 준비의 일환으로 소학교 교사 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됐다. 일곱 차례에 걸쳐 졸업생 19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한성사범학교는 이후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년) -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더욱 적극적으로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1899년 고종은 “우리나라에 각종 학교를 대략 설치했으나 의학교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며 의학교관제를 반포하고 전문 의료인을 양성했다. 의학교는 이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의학전문학교-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계승됐다. 대한의원은 1901년 최초로 교육부 산하에 산파 및 간호부양성과를 신설하는데 이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의 시작이었다. 1904년에는 농업과 상업을 가르치는 농상공학교가 개교했고, 이후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면서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이어졌다.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청 문화교육부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대학교에 따르면, 조선교육심의회에서 현대적 국립대학을 건립할 때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 공립 및 사립의 전문학교를 통합하자는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으로써 서울대학교는 공식적으로 설립됐다. 이 법령의 내용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 공 · 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가 1946년 10월에 개교하였다. 초대 총장으로 해리 엔스테드 미국 해군 대위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에 있던 교수, 직원, 학생들은 반대 운동을 강렬히 전개했으며, 이를 국대안 파동이라 부른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1951년부터는 부산으로 옮겨가 전시연합대학의 형태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듬해 5월에 전시 연합대학은 해체됐으며, 그 다음 해인 1953년 9월 18일이 돼서야 본부와 문리과 대학이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1960년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으로 서울대학교 재학생 7명이 사망했으며, 그 해 11월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됐다. 4·19 혁명이 끝나고 대학에는 학생회 조직과 같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잠시 조성됐으나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탄압이 다시 이어졌다. 1960년대는 이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지는 시기였다. 한편 1961년에는 정부의 ‘국립대학 정비절차’에 따라 많은 사범대 학과가 폐지되고 문리대로 합쳐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범대 교수와 학생들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듬해 정부는 없어진 학과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은 서울특별시 동숭동(문리과대학), 연건동(의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음악대학), 공릉동(공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 경기도 수원시(농과대학) 등 곳곳에 나뉘어 있었다. 이에 서울대학교는 종합화 계획을 세우고 1975년에 공과대학, 농과대학(현재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과 의과대학 본과만을 제외하고 단과대학들을 모두 새로 세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고, 1980년에는 노원구 공릉동의 공과대학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현재 공릉동 캠퍼스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수원에 남아 있던 단과대학도 2003년에 관악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현재와 같이 관악과 연건캠퍼스만 남게 됐다.
한편 10월 유신 이후 계속 억눌려 있던 대학에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1991년에 총장 선출 방식도 직선제로 변경됐다. 첫 직선제 총장인 김종운을 시작으로 이수성, 선우중호, 이기준, 정운찬, 이장무, 오연천 등이 총장으로 선출됐다.
2011년 12월 28일에는 새로 시행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46년 이래 65년 동안 유지해왔던 국립대학교 체제로부터 독립법인 체제로 전환하였다. 2014년 6월에는 평창캠퍼스가 준공됐으며 같은 해 7월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에 치러진 첫 간선제 총장 선거에서 성낙인이 제26대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2018년 7월까지 맡았다.
1895년 5월 10일 소학교 설립 준비의 일환으로 소학교 교사 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됐다. 일곱 차례에 걸쳐 졸업생 19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한성사범학교는 이후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년) -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더욱 적극적으로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1899년 고종은 “우리나라에 각종 학교를 대략 설치했으나 의학교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며 의학교관제를 반포하고 전문 의료인을 양성했다. 의학교는 이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의학전문학교-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계승됐다. 대한의원은 1901년 최초로 교육부 산하에 산파 및 간호부양성과를 신설하는데 이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의 시작이었다. 1904년에는 농업과 상업을 가르치는 농상공학교가 개교했고, 이후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면서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이어졌다.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청 문화교육부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대학교에 따르면, 조선교육심의회에서 현대적 국립대학을 건립할 때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 공립 및 사립의 전문학교를 통합하자는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으로써 서울대학교는 공식적으로 설립됐다. 이 법령의 내용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 공 · 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가 1946년 10월에 개교하였다. 초대 총장으로 해리 엔스테드 미국 해군 대위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에 있던 교수, 직원, 학생들은 반대 운동을 강렬히 전개했으며, 이를 국대안 파동이라 부른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1951년부터는 부산으로 옮겨가 전시연합대학의 형태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듬해 5월에 전시 연합대학은 해체됐으며, 그 다음 해인 1953년 9월 18일이 돼서야 본부와 문리과 대학이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1960년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으로 서울대학교 재학생 7명이 사망했으며, 그 해 11월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됐다. 4·19 혁명이 끝나고 대학에는 학생회 조직과 같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잠시 조성됐으나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탄압이 다시 이어졌다. 1960년대는 이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지는 시기였다. 한편 1961년에는 정부의 ‘국립대학 정비절차’에 따라 많은 사범대 학과가 폐지되고 문리대로 합쳐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범대 교수와 학생들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듬해 정부는 없어진 학과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은 서울특별시 동숭동(문리과대학), 연건동(의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음악대학), 공릉동(공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 경기도 수원시(농과대학) 등 곳곳에 나뉘어 있었다. 이에 서울대학교는 종합화 계획을 세우고 1975년에 공과대학, 농과대학(현재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과 의과대학 본과만을 제외하고 단과대학들을 모두 새로 세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고, 1980년에는 노원구 공릉동의 공과대학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현재 공릉동 캠퍼스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수원에 남아 있던 단과대학도 2003년에 관악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현재와 같이 관악과 연건캠퍼스만 남게 됐다.
한편 10월 유신 이후 계속 억눌려 있던 대학에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1991년에 총장 선출 방식도 직선제로 변경됐다. 첫 직선제 총장인 김종운을 시작으로 이수성, 선우중호, 이기준, 정운찬, 이장무, 오연천 등이 총장으로 선출됐다.
2011년 12월 28일에는 새로 시행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46년 이래 65년 동안 유지해왔던 국립대학교 체제로부터 독립법인 체제로 전환하였다. 2014년 6월에는 평창캠퍼스가 준공됐으며 같은 해 7월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에 치러진 첫 간선제 총장 선거에서 성낙인이 제26대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2018년 7월까지 맡았다.
4. 상징[편집]
- 서울대학교의 정문 '샤' : 거대한 ‘샤’모양의 정문은 국립법인서울대학교를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조형물이다.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가 관악구 현 위치에 자리잡으면서, 학교 상징의 기초를 토대로 만들어진 정문은 서울대학교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립법인서울대학교의 머릿글자인 ‘ㄱ’ ‘ㅅ’ ‘ㄷ’ 의 형상을 본뜬 디자인은 열쇠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본교의 교훈, ‘진리는 나의 빛’의 진리를 찾기 위한 열쇠를 상징하기도 한다.
- 느티나무 : 서울대학교의 교목인 느티나무는 포용력과 너그러움을 상징한다. 느티나무는 목재의 재질이 좋고 결이 아름다워 규목이라 불리며 목공예의 재료로 오랫동안 사랑 받아왔다. 병해충에 강하고 잎새와 줄기가 깔끔해 예로부터 선비정신을 표상하는 나무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생명력과 포용력은 본교의 건학이념과 일치한다.
- 백학(교조) : 고고함과 비상의 정신 순백으로 빛나는 몸, 고고한 자태와 날개를 쫙 펴고 비상하는 백학의 모습은 세속의 복잡한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해 오직 학문의 정도를 걸으며 날개를 펴고 비상을 준비하는 서울대학교의 의지가 담겨 있다.
- 쌍학(조형물) : 1998년 10월 14일, 모교 개교 52주년 기념식에 맞춰 제작한 모교 상징 조형물이다. 신호제지의 이형국(경제 60-68) 동문의 출연으로 미대 조소과 엄태정 명예교수가 제작(540cm x 540cm x 740cm)한 것으로 학의 활짝 펼친 날개와 다리 모습을 표현했다. 날개와 다리는 청동이고, 좌대는 황강석이며,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인 '겨레와 함께 미래로'가 烏石(흑요암)에 새겨져 있다.
5. 역대 총장[편집]
서울대학교 총장은 대한민국 내에서의 서울대학교의 위상으로 인해 대한민국 고등교육 및 학문 분야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지위는 장관급이다.
1946년 개교 이후 총 26명의 총장이 배출되었으며 이들 중 3명이 국무총리, 6명이 장관을 지냈다. 개교 초기부터는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제였으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제19대 총장부터 직선제로 바뀌었으며, 2011년에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 간선제로 다시 바뀌었다.
1946년 개교 이후 총 26명의 총장이 배출되었으며 이들 중 3명이 국무총리, 6명이 장관을 지냈다. 개교 초기부터는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제였으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제19대 총장부터 직선제로 바뀌었으며, 2011년에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 간선제로 다시 바뀌었다.
서울대학교 역대 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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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학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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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캠퍼스[편집]
8. 학생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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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울대학교의 위상[편집]
대한민국 정부가 시행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수석들 및 수능만점자들이 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생들이 대한민국 학계·정계·재계에 대거 포진돼 있다. 많은 인재를 배출해내고 있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혹은 '대한민국의 최고 지성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금수저들만 가는 명문대인 서울대학교의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서울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69] 실제로 진보정권에서는 반지성주의를 내세워 서울대학교 폐지론을 내세웠으나 절대적으로 무산되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타임스가 발표한 세계 대학 평가와 전문 대학평가 기관인 QS가 발표한 QS 세계 대학 평가 등의 세계 대학 평가에서 서울대학교의 순위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2005년 93위로 처음 100위권에 진입한데 이어 2006년 63위, 2007년 51위, 2008년 50위, 2009년 47위, 2010년 50위, 2011년 42위, 2012년 37위, 2013년 35위, 2014년 31위로 아시아 최고의 명문이자 일본 최고의 명문이라고 하는 도쿄대와 동위에 자리하는 등 매년 순위가 올랐으며, 이렇듯 국외 종합 평가에서도 국내 대학 가운데 최고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2015년까지 세계 30대 대학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으며 2025년 이내에는 세계 순위에서 무려 10위권 대학 가운데 들겠다는 포부를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QS 평가는 학술적, 혹은 연구성과 보다는 평판도가 대학 순위에 큰 비중을 차지해서 신뢰성의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삼부요인을 배출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 3명, 국무총리 15명, 국회의장 7명을 배출하여 아시아 6위·국내 1위에 올랐다. 또한, 2009년 서울대학교는 프랑스 파리 국립광업학교가 실시한 최고경영자배출능력에 따른 대학평가에서 세계 500대 기업 CEO 중 9명을 배출해 세계 5위에 올랐다.
2015년에 타임스 등 여러 대학 평가기관에서 평가대학을 확대하고, 채점기준을 바꾸면서 QS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대학 평가기관 순위가 하락했다. 2015년 타임스 기준 순위는 85위, ARWU 기준 순위 100위권 이하, 2018 US News&World Report 기준 순위 129위이다.
2024년에 저명한 정재계 인사를 다시 여럿 배출하며 QS가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 31위에 올랐다. 이는 도쿄대학교, 존스홉킨스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보다 높은 순위이다. 하지만 나머지 한국대학은 대부분 하락했고 서울대학교만 여전히 강세로 기염을 토하고 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타임스가 발표한 세계 대학 평가와 전문 대학평가 기관인 QS가 발표한 QS 세계 대학 평가 등의 세계 대학 평가에서 서울대학교의 순위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2005년 93위로 처음 100위권에 진입한데 이어 2006년 63위, 2007년 51위, 2008년 50위, 2009년 47위, 2010년 50위, 2011년 42위, 2012년 37위, 2013년 35위, 2014년 31위로 아시아 최고의 명문이자 일본 최고의 명문이라고 하는 도쿄대와 동위에 자리하는 등 매년 순위가 올랐으며, 이렇듯 국외 종합 평가에서도 국내 대학 가운데 최고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2015년까지 세계 30대 대학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으며 2025년 이내에는 세계 순위에서 무려 10위권 대학 가운데 들겠다는 포부를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QS 평가는 학술적, 혹은 연구성과 보다는 평판도가 대학 순위에 큰 비중을 차지해서 신뢰성의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삼부요인을 배출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 3명, 국무총리 15명, 국회의장 7명을 배출하여 아시아 6위·국내 1위에 올랐다. 또한, 2009년 서울대학교는 프랑스 파리 국립광업학교가 실시한 최고경영자배출능력에 따른 대학평가에서 세계 500대 기업 CEO 중 9명을 배출해 세계 5위에 올랐다.
2015년에 타임스 등 여러 대학 평가기관에서 평가대학을 확대하고, 채점기준을 바꾸면서 QS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대학 평가기관 순위가 하락했다. 2015년 타임스 기준 순위는 85위, ARWU 기준 순위 100위권 이하, 2018 US News&World Report 기준 순위 129위이다.
2024년에 저명한 정재계 인사를 다시 여럿 배출하며 QS가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 31위에 올랐다. 이는 도쿄대학교, 존스홉킨스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보다 높은 순위이다. 하지만 나머지 한국대학은 대부분 하락했고 서울대학교만 여전히 강세로 기염을 토하고 있다.
10. 서울대학교/사건사고[편집]
서울대학교/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11.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