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문서의 이전 버전(에 수정)을 보고 있습니다. 최신 버전으로 이동
분류
↑ 상위 문서: 오세훈
1. 개요[편집]
오세훈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유년기[편집]
1961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의 후손으로[5] 경기도 용인에서 10대째 살아온 집안이나 경술국치에 몰락하였다.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회억리에 조부모와 조상의 선산을 두고 있다.
오세훈은 어린 시절을 "산꼭대기 동네에 살면서 호롱불 켜고 우물물 길러 다니면서 학원도 못 다닐 정도로 어려운 집안 형편이었으며, 숙제는 해가 지기 전에 미리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라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부도 직전의 건설회사에 재직하여 급여는 밀리기가 일쑤였고, 어머니는 부업으로 침구류를 만들었다. 오세훈은 카나리아 같은 관상용 새를 키워 돈을 벌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회사 사정으로 온 가족이 부산 광복동으로 이사하여 사무실 한켠에 임시로 칸을 막고 다다미를 깔고 지냈다.
대일고등학교 3학년인 1978년 송상호와 짝이 되었다. 송상호는 오세훈보다 한 학년 위였지만 몸이 좋지 않아 한해 학교를 쉰 뒤 3학년으로 복학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학교를 자주 빠지던 송상호의 숙제를 위해 그의 집을 자주 들르면서 송상호의 여동생인 송현옥과 만났다. 그 뒤 송현옥과 같은 대학 커플로 이어지고 후에 결혼하게 된다. 1979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법정학부에 입학하였으며, 그 후 고려대학교 법대로 편입하였다.
오세훈은 어린 시절을 "산꼭대기 동네에 살면서 호롱불 켜고 우물물 길러 다니면서 학원도 못 다닐 정도로 어려운 집안 형편이었으며, 숙제는 해가 지기 전에 미리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라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부도 직전의 건설회사에 재직하여 급여는 밀리기가 일쑤였고, 어머니는 부업으로 침구류를 만들었다. 오세훈은 카나리아 같은 관상용 새를 키워 돈을 벌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회사 사정으로 온 가족이 부산 광복동으로 이사하여 사무실 한켠에 임시로 칸을 막고 다다미를 깔고 지냈다.
대일고등학교 3학년인 1978년 송상호와 짝이 되었다. 송상호는 오세훈보다 한 학년 위였지만 몸이 좋지 않아 한해 학교를 쉰 뒤 3학년으로 복학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학교를 자주 빠지던 송상호의 숙제를 위해 그의 집을 자주 들르면서 송상호의 여동생인 송현옥과 만났다. 그 뒤 송현옥과 같은 대학 커플로 이어지고 후에 결혼하게 된다. 1979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법정학부에 입학하였으며, 그 후 고려대학교 법대로 편입하였다.
3. 변호사, 방송인 활동[편집]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16기로 입소하였다. 졸업시험 도중 점심으로 먹은 콩비지가 탈을 일으켜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해당 시험은 결시처리되었다. 이로 인해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시보로 연수 중에 사법연수원에서 유급 결정이 내려져 17기로 수료하였다. 1987년 오세훈은 사법연수원생 신분으로, 강간치상 혐의로 재판중인 피고인을 무료변론하게 된다. 이 형사재판에서 검찰의 기소에 대해 무죄를 받아내었다. 오세훈은 이 사건의 변론요지서를 간직하고 훗날 방송에서 '내 인생의 사과나무'라며 소개했다.
1988년 육군에 입대하여 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정보처(2처) 공보정훈장교로 복무했고,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법을 전공하여 1990년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육군에 입대하여 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정보처(2처) 공보정훈장교로 복무했고,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법을 전공하여 1990년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3.1. 대한민국 최초의 일조권 침해 피해보상 판결[편집]
1991년 변호사를 개업했고, 얼마 되지 않아 인천 산곡동 경남아파트 주민집단소송 사건을 수임하였다. 건설사가 아파트의 간격을 기준보다 가깝게 지어 햇볕이 들지 않아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건설사와 보상 협의를 시도했으나 결렬되었고, 구청에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주민들은 서울남부지법에 공동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당시 헌법35조에 명시된 환경권은 그저 조문일 뿐 형사·민사상 판례는 전무하였다. 이에 오세훈 변호사는 같은 대륙법계 국가인 옆나라 일본의 건축기본법과 판례를 연구해 변론자료로 사용하였고, 한국감정원의 감정촉탁의뢰, 그리고 서울대 건축공학과 김광우 교수를 감정인으로 선임하여 과학적인 피해보상액을 산정하였다. 결국 2년 6개월에 걸친 법정싸움 끝에 1심에서 재판부는 주민들의 손을 들어 주고 건설사가 주민들에게 총 13억원을 배상하라는 2년 후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도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헌법 조문상으로만 존재했던 환경권이 실질적 권리로 인정받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건이었고, 법원은 구체적인 일조권 침해의 기준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건축법시행령 제86조 제2호 (나) 목에 의하면 연속하여 일조를 확보하는 기준을 건축조례에 위임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당시 지방자치단체에는 관련 조례가 전무하였다. 그리하여 일조권을 침해받아도 행정기관으로부터 '법적 하자가 없다'고 반문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 판결을 계기로 '동지일을 기준으로 9시부터 15시까지 6시간동안 일조시간이 2시간 이상 연속으로 확보되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됨에 따라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토지공법학회 학술저널에 '일조권에 대한 사법적 검토'라는 제목의 학술논문을 게재하였다. 본격적으로 오세훈은 환경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7년 서울시 구로구 재건축현장에서 고층 아파트에 가려 주변 단독주택 거주자들의 일조권이 침해당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도 1심에선 이미 패소한 상황에서 오세훈 변호사는 2심에서 공사중지 판결을 이끌어냈다.
3.2. 시민운동과 방송계 진출[편집]
일조권 침해 소송을 진행하며 여러 시민단체와 접촉한 것을 계기로 최열 대표와 환경운동연합의 창립멤버로 참여했고, 1992년 환경운동연합 시민상담실 실장이 되어 5년간 무료상담을 진행했다. 그와 동시에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시작한 '형사당직변호사'로 활동하였고, 1996년에는 형사당직변호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대한변호사협회 환경문제연구위원회 의원을 역임했고, 1997년 서울시 녹색시민위원회 감사를 맡았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회 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을 지냈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환경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환경변호사로서 자연공원법 입법청원 및 의회입법 발의,[12], 통합선거법 제87조의 위헌에 관한 헌법소원, 고리핵발전소 방사능 누출사고 현장 조사 후 책임자 고소, 상계소각장 환경영향평가 조작사건 수사촉구, 패스트푸드점 환경실태 조사에 관한 기자회견, 그린벨트 해제안에 대한 헌법소원(민변 환경특위) 등으로 활동하였다.
일조권 소송에서 새내기 변호사가 대기업 변호인단을 상대로 승소한 이 사건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언론 매체에 보도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던 중 MBC뉴스 손석희 아나운서와 인터뷰한 것을 지켜본 방송국 관계자가 오세훈에게 방송출연을 권유하면서 오세훈 변호사는 배금자 변호사와 함께 MBC에서 방영한 《오변호사 배변호사》의 진행자가 되었다. 한국 복장기술경영협회에서 발표한 양복이 제일 잘 어울리는 베스트 드레서10에 선정되었고,[16] 씨네2000에서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가장 사귀고 싶은 유부남' 1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프로그램의 인기와 더불어, 방송 내용을 수필로 엮은 저서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는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에 TOP 10에 진입하였다. 오세훈은 남성 정장브랜드 '로가디스'의 초대 TV CF모델로도 활동했고, 생명보험협회 TV CF모델로도 활동했다. 1996년 동아일보의 결혼하고 싶은 남성(상) 설문조사에서 배우 이병헌을 제치고 6위로 조사됐다.
1996년 5월에는 시사저널 편집자문위원에 위촉된 뒤, 10월부터 1년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을 맡았다.[20] 이 기간 중 이권단체들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고 방송을 진행했다. 이 외에도 《갑론을박 동서남북》, 《오늘과 내일》, 《뉴스 따라잡기》 등의 TV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경원대학교에서 민사소송법 강사로 재직하였고, 1997년 9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에서 민사소송법의 겸임 교수로 일했다. 1998년 미국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 Law School에서 Visiting Scholar로 재직 후 199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사소송법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이장호, 김기수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1999년 3월 다시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민사소송법 겸임교수로 위촉되었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매맞는 여성의 쉼터)에서 공익변호사로서 무료법률상담을 하기도 했으며, 2000년부터 다시 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조권 소송에서 새내기 변호사가 대기업 변호인단을 상대로 승소한 이 사건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언론 매체에 보도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던 중 MBC뉴스 손석희 아나운서와 인터뷰한 것을 지켜본 방송국 관계자가 오세훈에게 방송출연을 권유하면서 오세훈 변호사는 배금자 변호사와 함께 MBC에서 방영한 《오변호사 배변호사》의 진행자가 되었다. 한국 복장기술경영협회에서 발표한 양복이 제일 잘 어울리는 베스트 드레서10에 선정되었고,[16] 씨네2000에서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가장 사귀고 싶은 유부남' 1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프로그램의 인기와 더불어, 방송 내용을 수필로 엮은 저서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는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에 TOP 10에 진입하였다. 오세훈은 남성 정장브랜드 '로가디스'의 초대 TV CF모델로도 활동했고, 생명보험협회 TV CF모델로도 활동했다. 1996년 동아일보의 결혼하고 싶은 남성(상) 설문조사에서 배우 이병헌을 제치고 6위로 조사됐다.
1996년 5월에는 시사저널 편집자문위원에 위촉된 뒤, 10월부터 1년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을 맡았다.[20] 이 기간 중 이권단체들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고 방송을 진행했다. 이 외에도 《갑론을박 동서남북》, 《오늘과 내일》, 《뉴스 따라잡기》 등의 TV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경원대학교에서 민사소송법 강사로 재직하였고, 1997년 9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에서 민사소송법의 겸임 교수로 일했다. 1998년 미국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 Law School에서 Visiting Scholar로 재직 후 199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사소송법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이장호, 김기수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1999년 3월 다시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민사소송법 겸임교수로 위촉되었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매맞는 여성의 쉼터)에서 공익변호사로서 무료법률상담을 하기도 했으며, 2000년부터 다시 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4. 제16대 국회의원[편집]
2004년 3월 9일 의원총회에서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추를 발의하였을 때 오세훈은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이에 반대하여 서명하지 않았으나, 3월 12일 본회의에서의 표결에 참가했다.
2004년 4월 1일 만우절을 맞아 신라대학교 모 학과에서 평가한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에 오세훈 한나라당 의원 등을 선정하여 기념패를 전달하였다.
오세훈은 총선 불출마 선언 후 2500만원의 의정활동 잔여금 중 1500만원은 환경재단에, 1000만원은 서울문화재단에 기부했고, 신문광고 수익금 3000만원을 장애 아동과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회복지법인 대한사회복지회에 기탁했다.
2004년 4월 1일 만우절을 맞아 신라대학교 모 학과에서 평가한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에 오세훈 한나라당 의원 등을 선정하여 기념패를 전달하였다.
오세훈은 총선 불출마 선언 후 2500만원의 의정활동 잔여금 중 1500만원은 환경재단에, 1000만원은 서울문화재단에 기부했고, 신문광고 수익금 3000만원을 장애 아동과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회복지법인 대한사회복지회에 기탁했다.
5. 국회의원 퇴임 후[편집]
2004년 법무법인 지성에서 대표변호사를 역임했다. 오세훈 변호사는 중국경제 전문변호사로의 계획을 밝혔다. 그 이후 아파트 관리 프로그램 업체들의 발전을 위한 '한국 공동주택 관리협의회'에 고문변호사로 추대되었다. 2004년 장진, 이영재, 송일곤 감독의 영화 《1.3.6》 중 '뫼비우스의 띠'에 특별출연하기도 하였다. 2004년 설악국제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대회에 참가하여 3시간 25분 14초에 수영 1.5Km, 사이클 40Km, 마라톤 10Km를 완주하였다. 이후 트라이애슬론 동호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후 Tri-A라는 동호회를 창단하여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2005년 통영 국제트라이애슬론 대회에서는 배우 송일국,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과 팀을 이루어 출전하였다.
2005년 한국 여성재단에서 창립한 '미래포럼'에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과 함께 공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50] 또한 같은 해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자문변호사에 위촉되어 활동하였다.[51] 그리고 대한사회복지회 요청으로 인한 '사랑의 사진전' 모델료로 받은 3000만원 전액을 장애아와 미혼모를 위해 써달라며 기탁하였다. 2005년 12월에는 '희망원정대' 2기 원정대원으로, 엄홍길 원정대장 및 가수 안치환 등과 함께 장애인의 멘토가 되어 함께 킬리만자로 등반에 나섰다.
국립발레단의 저명인사 초청 발레공연에 초청되어 연습 후 실제 무대에 출연하였다. 현대무용가 최정자 교수와 공동으로 무용문화포럼을 창립하고 공동대표를 역임하였다. 부산 대우 월드마크 분양 과정에서 법조타운이라는 해당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오세훈을 아파트 광고모델로 기용하였다. 그리고 국회의원 시절 '오세훈법' 을 통과시키며 얻은 깨끗한 정치 이미지로 청호나이스 아이스콤보의 TV광고를 촬영하였고 '속 보이는 얼음처럼 세상도 투명하게'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2005년 6월 여론조사 결과 오세훈은 서울시장 선호 후보 1위로 조사되었다. 11월 2일 오세훈은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출마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그 이후 한나라당에서는 맹형규, 홍준표, 박진 등의 인사가 계속 거론되었으나, 2006년 4월 5일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강금실 전 장관이 여론조사 결과 1위로 나타나자, 한나라당 소장파들은 적극적으로 오세훈의 영입을 주장했다. 결국 2006년 4월 9일 경선 참여를 선언하고, 4월 25일 여론조사에서 65.05%의 지지율을 얻으며 총 41%의 득표로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됐다.
2006년 5월 2일 강금실이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공천된 직후 나온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세훈은 지지율에서 20%p이상 강금실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연령층 지지율에서도 오세훈은 강금실을 앞섰다.
오세훈 후보는 세운상가와 동대문 운동장 철거, 강북 중심의 뉴타운 50곳 건설 등 강북 개발과 경유버스를 천연가스 버스로 교체하고 오래된 화물차를 폐기 유도한다는 대기질 개선 공약을 내걸었다. 한편, 오세훈이 변호사 시절 찍었던 정수기 CF가 선거일 90일 전부터 본인이 등장하는 동영상, 사진 광고를 금지한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고소되기도 했다. 5월 21일 오세훈 후보의 유세를 돕던 박근혜 대표가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지충호에게 문구용 칼로 습격당했다. 이후 지지율 격차는 더 벌어지면서 제4회 지방 선거에서 오세훈은 2,409,760표(61.05%)를 득표하며 1,077,890표(27.31%)를 얻은 강금실을 제치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2005년 한국 여성재단에서 창립한 '미래포럼'에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과 함께 공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50] 또한 같은 해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자문변호사에 위촉되어 활동하였다.[51] 그리고 대한사회복지회 요청으로 인한 '사랑의 사진전' 모델료로 받은 3000만원 전액을 장애아와 미혼모를 위해 써달라며 기탁하였다. 2005년 12월에는 '희망원정대' 2기 원정대원으로, 엄홍길 원정대장 및 가수 안치환 등과 함께 장애인의 멘토가 되어 함께 킬리만자로 등반에 나섰다.
국립발레단의 저명인사 초청 발레공연에 초청되어 연습 후 실제 무대에 출연하였다. 현대무용가 최정자 교수와 공동으로 무용문화포럼을 창립하고 공동대표를 역임하였다. 부산 대우 월드마크 분양 과정에서 법조타운이라는 해당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오세훈을 아파트 광고모델로 기용하였다. 그리고 국회의원 시절 '오세훈법' 을 통과시키며 얻은 깨끗한 정치 이미지로 청호나이스 아이스콤보의 TV광고를 촬영하였고 '속 보이는 얼음처럼 세상도 투명하게'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2005년 6월 여론조사 결과 오세훈은 서울시장 선호 후보 1위로 조사되었다. 11월 2일 오세훈은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출마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그 이후 한나라당에서는 맹형규, 홍준표, 박진 등의 인사가 계속 거론되었으나, 2006년 4월 5일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강금실 전 장관이 여론조사 결과 1위로 나타나자, 한나라당 소장파들은 적극적으로 오세훈의 영입을 주장했다. 결국 2006년 4월 9일 경선 참여를 선언하고, 4월 25일 여론조사에서 65.05%의 지지율을 얻으며 총 41%의 득표로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됐다.
2006년 5월 2일 강금실이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공천된 직후 나온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세훈은 지지율에서 20%p이상 강금실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연령층 지지율에서도 오세훈은 강금실을 앞섰다.
오세훈 후보는 세운상가와 동대문 운동장 철거, 강북 중심의 뉴타운 50곳 건설 등 강북 개발과 경유버스를 천연가스 버스로 교체하고 오래된 화물차를 폐기 유도한다는 대기질 개선 공약을 내걸었다. 한편, 오세훈이 변호사 시절 찍었던 정수기 CF가 선거일 90일 전부터 본인이 등장하는 동영상, 사진 광고를 금지한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고소되기도 했다. 5월 21일 오세훈 후보의 유세를 돕던 박근혜 대표가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지충호에게 문구용 칼로 습격당했다. 이후 지지율 격차는 더 벌어지면서 제4회 지방 선거에서 오세훈은 2,409,760표(61.05%)를 득표하며 1,077,890표(27.31%)를 얻은 강금실을 제치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