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Социјалистичка Федеративна Р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 | ||
국기 | 국장 | |
1943년 11월 29일 ~ 1992년 4월 27일 | ||
기본 정보 | ||
성립일 | 1942년 11월 29일 | |
멸망일 | 1992년 4월 27일[1] | |
현재 국가 |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코소보 크로아티아 | |
수도 | 베오그라드 | |
종교 | ||
인문 | ||
공용어 | 세르보크로아트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 |
민족 | 세르브인 (36.3%) 크로아트인 (19.7%) 보슈냐크인 (8.9%) 슬로벤인 (7.8%) 알바니아인 (7.7%) 마케도니아인 (6.0%) 몬테네그로인 (2.6%) 헝가리인 (1.9%) 기타 (3.9%) | |
인구 | 23,229,846명 | |
면적 | 255,804 km² | |
정치 | ||
정치체제 | ||
이반 리바르 (1945년 ~ 1953년) 밀란 판체브스키 (1989년 ~ 1990년) | ||
요시프 브로즈 티토 (1945년 ~ 1963년) 안테 마르코비치 (1989년 ~ 1991년) 스체판 메시치 (1991년) | ||
연방 의회 |
1. 개요[편집]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1945년에서 1992년까지 동남유럽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연방 국가였다.
2. 상세[편집]
1945년부터 1963년까지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이라고 불렸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유고 연방'이라고 불렸다.
유고슬라비아는 세계 2차 대전의 독일과 그 추축국들의 여파로 건국되었으며, 1992년 해체 될 때까지 유럽의 남동부 및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연방국가이다. 또한 공산주의자 연맹이 통치하는 일당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총 7개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연방 형태이었으며,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삼았다.
유고슬라비아는 1942년 11월 26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추축국 점령에 저항하기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위원회가 결성된 때로 그 기원을 추적한다. 국가가 해방된 후 국왕 페타르 2세가 폐위되고 군주제가 종료되었으며 1945년 11월 29일에 유고슬라비아 인민 연방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새 공산주의 정부는 냉전 초기에 동구권 편을 들었지만 1948년 스탈린 반열 즉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 제명 및 티토가 스탈린과의 사이가 분열된 후 유고슬라비아는 중립 정책을 추구했다. 그후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와 같은 제3국의 중심이 되어 유고연방은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
1980년 5월 4일 류블랴나의 한 병원에 입원해있던 티토가 회복에 실패해 사망하자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점점 붕괴되기 시작했고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증가했다. 경제 위기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민족적 민족주의와 정치적 반체제 인사를 증가시켰다. 동유럽에서 소비에트 연방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연방으로의 전환도 실패하고 말았다. 연방 중에서 가장 부유했던 공화국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1991년에 분리되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연방 공화국의 경계를 따라 해산된 연방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시작으로 가속화되었으며 연방은 1992년 4월 27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20세기 최악의 비극이라 불리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며 유고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즉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신유고는 구유고 연방이 재구성된 국가로 남아 있었지만 이 주는 국제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구 유고슬라비아라는 용어는 이제 일반적으로 과거 발칸에 존재했던 공산유고를 지칭하며 사용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세계 2차 대전의 독일과 그 추축국들의 여파로 건국되었으며, 1992년 해체 될 때까지 유럽의 남동부 및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연방국가이다. 또한 공산주의자 연맹이 통치하는 일당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총 7개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연방 형태이었으며,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삼았다.
유고슬라비아는 1942년 11월 26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추축국 점령에 저항하기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위원회가 결성된 때로 그 기원을 추적한다. 국가가 해방된 후 국왕 페타르 2세가 폐위되고 군주제가 종료되었으며 1945년 11월 29일에 유고슬라비아 인민 연방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새 공산주의 정부는 냉전 초기에 동구권 편을 들었지만 1948년 스탈린 반열 즉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 제명 및 티토가 스탈린과의 사이가 분열된 후 유고슬라비아는 중립 정책을 추구했다. 그후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와 같은 제3국의 중심이 되어 유고연방은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
1980년 5월 4일 류블랴나의 한 병원에 입원해있던 티토가 회복에 실패해 사망하자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점점 붕괴되기 시작했고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증가했다. 경제 위기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민족적 민족주의와 정치적 반체제 인사를 증가시켰다. 동유럽에서 소비에트 연방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연방으로의 전환도 실패하고 말았다. 연방 중에서 가장 부유했던 공화국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1991년에 분리되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연방 공화국의 경계를 따라 해산된 연방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시작으로 가속화되었으며 연방은 1992년 4월 27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20세기 최악의 비극이라 불리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며 유고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즉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신유고는 구유고 연방이 재구성된 국가로 남아 있었지만 이 주는 국제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구 유고슬라비아라는 용어는 이제 일반적으로 과거 발칸에 존재했던 공산유고를 지칭하며 사용된다.
3. 역사[편집]
1945년 11월 29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야이체에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 뒤부터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소련의 지원을 통해 군주제를 폐지하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유고슬라비아)을 수립했다. 1946년에는 공산주의 신헌법을 제정했으며 1974년에는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와 코소보를 연방직할 자치주로 승격시켰다.
국가원수에 취임한 티토는 1948년 민족주의를 주장, 소련의 지도권을 부인하다가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후 "독자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를 지향하였다. 비동맹 중립주의, 미국·소련의 권력 정치 배격으로 대표되는 티토주의는 동구권에서 서방권 측과 관계 개선을 도모한 이단자로 규정되었으나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점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중앙유럽의 여타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바르샤바 조약에도 경제상호원조회의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도 아래 비동맹 운동 노선을 걸었다. 그래서 티토의 자주적인 정치노선을 티토주의라고 부른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전개된 브레즈네프·코시긴 등 소련 수뇌부와 티토 간의 상호 교환 방문과 1977년 소련의 불간섭 원칙의 확인으로 양국 관계가 호전되었으며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기업의 영리·이윤제 등 시장경제 구조를 도입, 독자적인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추진함으로써 1970년대에는 경제적 발전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남유럽의 가장 부유한 공산 국가로 발전했다.
1980년 5월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망과 함께 분열 조짐을 보이며 연방 간부 회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연방의회는 연방원과 공화국·자치주원의 양원제였다. 1987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촉발되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중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자 유고 연방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분리 독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치른 후 1992년 남은 공화국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결성하면서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45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소련의 지원을 통해 군주제를 폐지하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유고슬라비아)을 수립했다. 1946년에는 공산주의 신헌법을 제정했으며 1974년에는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와 코소보를 연방직할 자치주로 승격시켰다.
국가원수에 취임한 티토는 1948년 민족주의를 주장, 소련의 지도권을 부인하다가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후 "독자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를 지향하였다. 비동맹 중립주의, 미국·소련의 권력 정치 배격으로 대표되는 티토주의는 동구권에서 서방권 측과 관계 개선을 도모한 이단자로 규정되었으나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점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중앙유럽의 여타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바르샤바 조약에도 경제상호원조회의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도 아래 비동맹 운동 노선을 걸었다. 그래서 티토의 자주적인 정치노선을 티토주의라고 부른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전개된 브레즈네프·코시긴 등 소련 수뇌부와 티토 간의 상호 교환 방문과 1977년 소련의 불간섭 원칙의 확인으로 양국 관계가 호전되었으며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기업의 영리·이윤제 등 시장경제 구조를 도입, 독자적인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추진함으로써 1970년대에는 경제적 발전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남유럽의 가장 부유한 공산 국가로 발전했다.
1980년 5월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망과 함께 분열 조짐을 보이며 연방 간부 회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연방의회는 연방원과 공화국·자치주원의 양원제였다. 1987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촉발되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중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자 유고 연방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분리 독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치른 후 1992년 남은 공화국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결성하면서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4. 정치[편집]
내부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6개의 구성국으로 분할되었다. 구성국들은 전쟁 기간 중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944년부터 1946년 사이에 형성이 완료되었다. 구성국들은 처음에 연방주로 지정되었지만, 1946년 1월 31일 첫 헌법이 채택된 후 인민공화국(1946년-1963년)으로, 이후로는 사회주의 공화국(1963년부터)으로 명명되었다. 구성국들은 헌법에 따라 연방 내에서 권리와 의무가 서로 평등한 것으로 정의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연방 단위 내에서 여러 자치 단위를 만드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2개의 자치 단위(보이보디나와 코소보)가 생성된 세르비아에서만 시행되었다.
5. 교육[편집]
유고슬라비아는 동남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도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나라를 건설하여 왔기 때문에 사회·경제체제에 있어서나 교육적인 면에서도 독자적인 방법을 보이고 있다. 1945년의 연방헌법은 교육의 보장, 학교의 공공화(公共化), 보통교육의 무상·의무제, 학교를 교회에서 분리하는 원칙 등을 정했다. 그러나 1953년의 신연방헌법은 지방분권화의 원칙을 추진하고 전반적인 교육정책, 법안의 입안과 각 공화국의 교육조정을 제외하고는, 각 공화국에 교육에 관한 여러 문제를 위임하는 원칙을 정했다. 한편 지방정부 레벨에 있어서의 분권화도 진행하여, 다른 공산주의 여러 나라의 이른바 민주적 집중제와는 그 양상을 달리했다.
의무교육은 7세에서 15세까지 8개년, 상하 2단계로 나뉘며, 하급은 전과담당제(全科擔當制)의 교원이, 상급은 2·3 교과 담당제 교원이 교육했다. 중등단계에는 4년제의 보통중등학교·전문중등학교, 2년 또는 3년제의 견습학교가 있었다. 중등교육에서의 외국어는 다른 남유럽 여러 나라처럼 러시아어가 필수는 아니었으며, 불·영·독·노·이탈리아어 중에서 선택하는 제도를 취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종합대학이 있었다. 성인교육에 있어서는 이미 문맹퇴치의 목표를 달성했으며, 노동자의 문화적·기술적인 수준을 높이는 자발적인 성인교육 기관으로서 이른바 노동자대학이 여러 참가자를 모아 성과를 보였다.
의무교육은 7세에서 15세까지 8개년, 상하 2단계로 나뉘며, 하급은 전과담당제(全科擔當制)의 교원이, 상급은 2·3 교과 담당제 교원이 교육했다. 중등단계에는 4년제의 보통중등학교·전문중등학교, 2년 또는 3년제의 견습학교가 있었다. 중등교육에서의 외국어는 다른 남유럽 여러 나라처럼 러시아어가 필수는 아니었으며, 불·영·독·노·이탈리아어 중에서 선택하는 제도를 취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종합대학이 있었다. 성인교육에 있어서는 이미 문맹퇴치의 목표를 달성했으며, 노동자의 문화적·기술적인 수준을 높이는 자발적인 성인교육 기관으로서 이른바 노동자대학이 여러 참가자를 모아 성과를 보였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수립으로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