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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8월 10일 |
사망 | 1932년 10월 10일 (향년 31세) / (사망 93주기) |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형무소 (現 도쿄도 신주쿠구 요초마치 4-12) | |
묘소 | |
국적 | |
본관 | 전주 이씨 (全州 李氏) |
신체 | 173cm |
가족 | 아버지 이진규 어머니 밀양 손씨 형 이범태 이복동생 이봉준, 이종태 |
후손 | 종손자 이세웅 (1955년 ~ 현재) |
직업 | |
종교 | 불교 |
소속 | 한인애국단 |
상훈 |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본관은 전주다. 일본으로 건너가 상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 단원이 되었다.
경성부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상점 점원, 철도청 견습생으로 일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점 점원과 막노동 등에 종사하였다. 1918년 철도국의 견습사원이 되었으나 1년 후 조선인보다 늦게 입사한 일본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에 분개하여 철도국을 그만두었고, 1928년에는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에 구경하러 갔다가, 한글과 한문으로 된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1일간 수감되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일본 정부에 항거하게 되었다.
1931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을 통해 김구를 찾아갔다. 능행에 오르던 천황을 눈앞에서 본 것을 밝히고 천황을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1932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 문 앞에서 쇼와 천황을 폭탄으로 저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일본식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 다른 가명은 아사야마이다. 경성부 출신.
경성부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상점 점원, 철도청 견습생으로 일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점 점원과 막노동 등에 종사하였다. 1918년 철도국의 견습사원이 되었으나 1년 후 조선인보다 늦게 입사한 일본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에 분개하여 철도국을 그만두었고, 1928년에는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에 구경하러 갔다가, 한글과 한문으로 된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1일간 수감되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일본 정부에 항거하게 되었다.
1931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을 통해 김구를 찾아갔다. 능행에 오르던 천황을 눈앞에서 본 것을 밝히고 천황을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1932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 문 앞에서 쇼와 천황을 폭탄으로 저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일본식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 다른 가명은 아사야마이다. 경성부 출신.
3. 생애[편집]
이봉창은 1900년 8월 10일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에서 이진규, 다른 이름은 이진구 또는 심규와 그의 부인인 밀양 손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 이범태는 노동자로 활동했고, 한때 소, 소가죽 등의 브로커로 일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진규에게는 두 명의 첩이 있었는데, 서모 주간난에게서는 서제인 이봉준과 이종태가 태어났다. 그는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기도 수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충청남도 공주를 거쳐 전라북도 전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이봉창의 선대는 경기도 수원에서 거주하였으며 아버지 이진규는 농업을 계승하여 중류층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하고 있었고, 당시 건축수요의 증대로 인해 자신이 자산을 모은 신흥자본가였다고 한다. 김구의 '도왜실기'에는 농업을 하던 아버지의 토지가 철도건설 계획지점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땅을 일본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생계를 꾸려나갈 길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거주하였다[2]고 기록 되어 있으나, 이는 진위가 의심스럽다. 그의 아버지는 1930년에 사망하고 형 이범태와 조카딸들은 해방직후에도 생존해 있었다.
이봉창은 용산의 문창보통소학교에 다녔다. 가정 형편이 안되었던 이봉창은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어릴 때는 집에서 글씨를 배우고 10세 이후 어렵게 용산의 문창보통소학교에 입학하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서당이나 집에서 글을 배우다 늦게 소학교에 입학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도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다가 소학교 김중환 교장의 권유로 소학교 학생이 되었다) 이봉창의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 이후 본처를 버리고 첩과 생활하게 되면서 가정 형편이 매우 악화되었다.
8세 때부터 금정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운 뒤 1910년 천도교에서 세운 청엽정의 문창소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문창소학교를 졸업하였다.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915년 경성부의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취직했다. 그 뒤 상점 점원과 막노동을 전전하였다.
14세~15세 무렵 그는 말라리아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관절염을 앓게 되었으며 항상 환절기에는 관절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이봉창의 선대는 경기도 수원에서 거주하였으며 아버지 이진규는 농업을 계승하여 중류층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하고 있었고, 당시 건축수요의 증대로 인해 자신이 자산을 모은 신흥자본가였다고 한다. 김구의 '도왜실기'에는 농업을 하던 아버지의 토지가 철도건설 계획지점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땅을 일본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생계를 꾸려나갈 길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거주하였다[2]고 기록 되어 있으나, 이는 진위가 의심스럽다. 그의 아버지는 1930년에 사망하고 형 이범태와 조카딸들은 해방직후에도 생존해 있었다.
이봉창은 용산의 문창보통소학교에 다녔다. 가정 형편이 안되었던 이봉창은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어릴 때는 집에서 글씨를 배우고 10세 이후 어렵게 용산의 문창보통소학교에 입학하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서당이나 집에서 글을 배우다 늦게 소학교에 입학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도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다가 소학교 김중환 교장의 권유로 소학교 학생이 되었다) 이봉창의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 이후 본처를 버리고 첩과 생활하게 되면서 가정 형편이 매우 악화되었다.
8세 때부터 금정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운 뒤 1910년 천도교에서 세운 청엽정의 문창소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문창소학교를 졸업하였다.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915년 경성부의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취직했다. 그 뒤 상점 점원과 막노동을 전전하였다.
14세~15세 무렵 그는 말라리아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관절염을 앓게 되었으며 항상 환절기에는 관절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3.1. 체포[편집]
1928년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을 구경하러 오사카에서 교토로 갔다가, 한문이 섞인 한글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교토 고조 경찰서에 체포되어 11일간 투옥되어 있다가 풀려났다.
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본명을 사용하다가는 차별대우를 받는 처지에 자괴감에 빠지게 했고, 이때부터 그는 독립운동에 종사할 뜻을 본격적으로 품게 된다.
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본명을 사용하다가는 차별대우를 받는 처지에 자괴감에 빠지게 했고, 이때부터 그는 독립운동에 종사할 뜻을 본격적으로 품게 된다.
3.2. 일본 정탐 활동[편집]
1929년 2월부터 9월까지 오사카시의 비누상점에 취직하였으나 수금한 매상금 100원을 갖고 도쿄로 달아났다. 이후 카코우 해산물 도매점의 점원으로 취직하였으나 동업자와의 경쟁에 싫증이 나 친구집에 머물거나 요시와라에서 여자를 사귀는 등 이틀 사흘밤 주인집에 돌아가지 않았다가 공장 기숙사의 주인으로부터 한심스럽다는 질책을 받자 회사를 그만둔다. 그 뒤 가방점의 외판원으로 취직하였으나 판매금을 탕진하고 그만두었다.
1930년 30세의 이봉창은 미혼이었다. 일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행과 함께 노동으로 허기를 채우며 적정을 정탐하기에 힘썼다.1931년 나고야에서는 병이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친구는 어느 일본인의 사위가 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봉창은 친구의 청을 거절하고 도쿄, 오사카 등지를 돌아다녔다. 이때 통상의 협의의 일본인의 말과 몸짓을 흉내내는 재주를 익혔다 한다.
1930년 30세의 이봉창은 미혼이었다. 일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행과 함께 노동으로 허기를 채우며 적정을 정탐하기에 힘썼다.1931년 나고야에서는 병이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친구는 어느 일본인의 사위가 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봉창은 친구의 청을 거절하고 도쿄, 오사카 등지를 돌아다녔다. 이때 통상의 협의의 일본인의 말과 몸짓을 흉내내는 재주를 익혔다 한다.
3.3. 한인애국단 가입[편집]
김구는 이봉창의 말을 듣고 그를 비범하게 보았으나 못 들은 체하고 내색하지 않았다. 이봉창의 취중 장담을 기억한 김구는 며칠 뒤 여관으로 다시 찾아왔고 이봉창은 계획한 바를 설명하였다. 김구는 그가 비범한 뜻을 품었고 여러 사람들이 의심한 것과 전혀 다른,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라 깨닫게 되었다.
1931년 2월 김구는 이봉창에게 상하이 홍구 방면에서 종적을 감추고 일본인 행세를 하여 세간의 이목을 피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기노시타라는 가명으로 홍구에 거주하며 양수포의 일본인 인쇄공장에 취직하여 다녔고 몇 달 뒤에는 일본인 악기점의 종업원으로 근무하여 일본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김구 선생과 3, 4개월에 한번씩 비밀리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뒤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암살 계획을 세웠다.
1931년 2월 김구는 이봉창에게 상하이 홍구 방면에서 종적을 감추고 일본인 행세를 하여 세간의 이목을 피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기노시타라는 가명으로 홍구에 거주하며 양수포의 일본인 인쇄공장에 취직하여 다녔고 몇 달 뒤에는 일본인 악기점의 종업원으로 근무하여 일본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김구 선생과 3, 4개월에 한번씩 비밀리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뒤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암살 계획을 세웠다.
3.4. 이봉창 의거[편집]
이봉창 의거 또는 사쿠라다문 의거는 1932년 1월 8일 일본 제국 도쿄의 사쿠라다문에서 일본 쇼와 천황에 대해 일어난 실패한 암살 시도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말이 다치고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 대작 두 명이 부상하였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직후 그는 처음에는 김구가 누군지 모른다고 일관하다가 뒤에 김구의 존재를 시인하고 그의 지시를 받았음을 진술하였다.
그는 곧 도쿄의 경찰서에 형법 제73조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곧 도요타마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 상태에서 그는 1월 8일 경시청에서 재판을 받고, 6월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뒤, 대법원에서 최종 선고를 받았다. 형무소에 수감 중 그는 불교 서적을 읽기도 했다.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은 사건에 대해 제1차 공판을 하고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이봉창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미혼으로 처자식은 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2세였다.
1995년 12월,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말이 다치고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 대작 두 명이 부상하였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직후 그는 처음에는 김구가 누군지 모른다고 일관하다가 뒤에 김구의 존재를 시인하고 그의 지시를 받았음을 진술하였다.
그는 곧 도쿄의 경찰서에 형법 제73조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곧 도요타마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 상태에서 그는 1월 8일 경시청에서 재판을 받고, 6월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뒤, 대법원에서 최종 선고를 받았다. 형무소에 수감 중 그는 불교 서적을 읽기도 했다.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은 사건에 대해 제1차 공판을 하고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이봉창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미혼으로 처자식은 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2세였다.
1995년 12월,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4. 사후[편집]
그의 거사는 실패하였으나 그의 뒤를 이은 윤봉길은 1차 거사에 실패하고 2차 거사에 성공한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기사회생하는데, 이봉창과 윤봉길의 잇단 거사로 침체기에 빠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임정에 대한 한인 교민단체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게 된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다시 돌려받아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김구는 그가 처형되던 그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여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의 폭탄 투척은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천황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데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다시 돌려받아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김구는 그가 처형되던 그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여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의 폭탄 투척은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천황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데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5. 사상과 신념[편집]
이봉창은 당시의 조선인들이 상당히 미신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신에 의존을 하면서도 진정한 신앙이나 믿음 같은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19] 그는 형무소를 방문한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은 대체로 미신적이지만 진정한 신앙심은 없고 또 믿음에 대한 이해력도 낮다고 생각합니다. 생활 상태, 문화의 정도도 아직 일본 사람에게조차 미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인들이 미신적인 믿음, 습성이 강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조선인에게는 인격적인 수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나는 종교로 조선인을 이끌고 정신 수양과 인격 양성 방면으로 힘써 간다면 조선인도 점점 발전해 일본인과 서로 이해하고 융화하여 피차 일본 국민으로서 유쾌하게 생활해 가게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써 조선인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라고 하였다.
6. 평가[편집]
인간주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봉창은 가난한 노동자로, 전혀 특별하지 않은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 평범한 삶에서 남 모를 식민지 사람의 고뇌가 있었고, 그럴수록 정직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다 민족문제를 느끼고 일왕의 저격을 결심한다. 그러니까 다른 영웅들처럼 어릴 때부터 무슨 민족을 외치고 영웅이 되려한 것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인간의 길을 갔다. 더욱이 영웅적 거사를 마치고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이봉창은 이처럼 식민지인으로서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다가 의열투쟁에 나섰다. 그의 범상한 생애 자체에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서 민족적 영웅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거창한 영웅주의를 내세운 여타의 경우와 다르다.
한인애국단 결성에 결정적이었다.
김구주석은 침체된 임시정부의 활로를 찾던중 이봉창과 조우했다. 이봉창은 애국단의 제1호 단원으로 입단하여 '최선봉장'이 되었다. 역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애국단은 당시 위기에 처한 임정의 활로를 열었는데, 그 애국단의 제1호 투쟁이 이봉창 의거로 나타남으로써 사실상의 출범식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큰 도움이 되어 광복군 창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봉창 거사는 임시정부를 부활시켰다.
지금은 자랑스런 임정으로 기록되지만 당시 임정은 내분과 어려운 여건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있었다. 집세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고 국내외의 동포로부터도 지지를 상실하여 존재가치를 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이봉창 의거를 단행케 한다. 이로써 무엇보다 임정이 죽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을 만방에 선포한 셈이고 대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이어 윤봉길 의거까지 성공해 국제적 지원까지 얻게 되고 임정은 민족적 기반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임정은 이로써 청사에 빛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이봉창은 가난한 노동자로, 전혀 특별하지 않은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 평범한 삶에서 남 모를 식민지 사람의 고뇌가 있었고, 그럴수록 정직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다 민족문제를 느끼고 일왕의 저격을 결심한다. 그러니까 다른 영웅들처럼 어릴 때부터 무슨 민족을 외치고 영웅이 되려한 것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인간의 길을 갔다. 더욱이 영웅적 거사를 마치고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이봉창은 이처럼 식민지인으로서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다가 의열투쟁에 나섰다. 그의 범상한 생애 자체에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서 민족적 영웅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거창한 영웅주의를 내세운 여타의 경우와 다르다.
한인애국단 결성에 결정적이었다.
김구주석은 침체된 임시정부의 활로를 찾던중 이봉창과 조우했다. 이봉창은 애국단의 제1호 단원으로 입단하여 '최선봉장'이 되었다. 역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애국단은 당시 위기에 처한 임정의 활로를 열었는데, 그 애국단의 제1호 투쟁이 이봉창 의거로 나타남으로써 사실상의 출범식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큰 도움이 되어 광복군 창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봉창 거사는 임시정부를 부활시켰다.
지금은 자랑스런 임정으로 기록되지만 당시 임정은 내분과 어려운 여건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있었다. 집세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고 국내외의 동포로부터도 지지를 상실하여 존재가치를 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이봉창 의거를 단행케 한다. 이로써 무엇보다 임정이 죽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을 만방에 선포한 셈이고 대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이어 윤봉길 의거까지 성공해 국제적 지원까지 얻게 되고 임정은 민족적 기반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임정은 이로써 청사에 빛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7. 여담[편집]
-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독립운동을 바라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1932년 2월 12일의 도요다마 형무소에서 열린 6차 재판 진술에서 그는 내가 조선의 독립을 바라게 된 것은 차별 대우가 그 주된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일찍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교토 오조경찰서의 검속으로 말미암아 처음 조선의 독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 그에 의하면 만약 내가 조선에 있었을 때 조선 독립을 생각했다면 나는 내지에 오지 않고 그곳에서 무엇인가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