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اسلامی جمہوریہ پاكستان
Islamic Republic of Pakistan
파일:파키스탄 국기.jpg
파일:파키스탄 국장.png
국기
국장
ایمان، اتحاد، نظم
믿음, 단결, 질서
국가 정보
국가명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독립
1947년 8월 1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
언어
우르두어, 펀자브어, 신드어, 영어, 파슈토어
면적
7,961만 ㏊ (35위)
인구
2억 4,048만 5,658명 (5위)
국교
수니파 이슬람교
종교
이슬람교 96.4%
기독교 3%
기타 0.06%
경제개발 수준
상징
국기
국가
파키스탄 국가
(قَومی ترانہ, Qaumi Taranah)
국화
수선화
정치
정치체제
대통령
아리프 알비 (2018년 9월 9일 ~ 현직)
총리
셰바즈 샤리프 (2022년 4월 11일 ~ 현직)
입법부
외교
가입 국제기구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 169
국가 코드
586, PK, PAK
국제 전화 코드
+92
여행 경보
여행자제
이슬라마바드, 페이살라바드, 라왈핀디, 라호르, 훈자, 길깃, 스카루드
출국권고
여행자제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
1. 개요2. 상세3. 국명4. 역사5. 이슬람6. 행정구역7. 자연환경
7.1. 지리7.2. 기후
8. 인문환경
8.1. 민족8.2. 언어8.3. 종교
9. 경제
9.1. 농업9.2. 산업9.3. 서비스업9.4. 관광업
10. 교통11. 문화
11.1. 의복11.2. 미디어11.3. 스포츠
12. 군대13. 정치14. 대외 관계15.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약칭 파키스탄은 남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2. 상세[편집]

아라비아 해와 오만 만을 따라 1,046km의 해안선을 남쪽에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서쪽으로는 이란, 북동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하고 있으며, 오만과는 해상 국경을 서로 접하고 있다.

권진건의 파키스탄은 여러 고대 문명들의 발원지로, 8,500년이 넘은 남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청동기 인더스 문명의 태동지이기도 하다.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이 등장하였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잠시 헬레니즘 제국을 통하여 파키스탄 지방을 정복한 이후에는 셀레우코스 제국, 마우리아 제국, 쿠샨 제국, 굽타 제국 등이 연달아 나고 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또한 우마이야 칼리파조, 가즈나 제국, 델리 술탄국, 무굴 제국, 두라니 제국, 시크 왕국 등이 파키스탄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근대기에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았고 1858년부터 1947년까지는 인도 제국으로 묶여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점차 인도 제국의 국민들이 자결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하자, 파키스탄 지방에서도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운동’이 일어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1946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1947년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힌두교가 주축이던 인도와, 이슬람교가 주축이던 파키스탄이 서로 분리독립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하거나 살해당하는 대규모 디아스포라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파키스탄은 민족적, 언어적으로도 굉장히 다원화된 국가이며, 지리와 야생환경도 다양한 편이다. 파키스탄은 1956년 헌법을 제정하여 이슬람 공화국임을 명시하였으며, 1971년에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이후 방글라데시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이후 약 40여 년 동안 파키스탄은 문민 정부와 군부 정권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집권하며 복잡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였으며,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속세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가 공존하는 굉장히 미묘한 사회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2008년에 완전한 문민정부를 선거를 통해 구성하였으며, 2010년에는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포함한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현재 6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갖추고 있으며, 핵보유국이며 핵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에 속하며, 그 경제성장률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파키스탄은 독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경제 성장과 벌어지는 빈부 격차, 군부의 권력 확장, 정치적 불안정, 부정부패, 높은 문맹률 등과 관련한 심각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심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UN, 상하이 협력 기구, OIC, 커먼웰스, SAARC, 비동맹 운동의 일원이기도 하다.

3. 국명[편집]

'파키스탄'이라는 국명은 우르두어나 페르시아어로 해석할 시에 '순수함이 넘치는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단어는 크게 '파키'라는 단어와 '스탄'이라는 단어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파키(پاک)'는 페르시아어로 '순수함', 혹은 '청정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스탄(ـستان)'은 페르시아어로 '풍요로운 곳', 혹은 '모든 것이 넘치는 곳'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국호는 파키스탄의 독립운동가인 초우드리 라흐마트 알리가 1933년에 발간한 팸플릿인 'Now or Never'에서, 인도 제국의 펀자브, 아프가니아, 카슈미르, 신드, 발루치스탄 등 5개의 북부 지방을 일컫기 위하여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팸플릿에는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3천만 무슬림들이여"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4. 역사[편집]

1947년 8월 14일, 영국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이 성립되었다.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이라는 형태로 무슬림 다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 영역은 현재 파키스탄 외에도 벵골의 일부(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것이었다. 또한, 국가 체제로 영국 국왕을 원수로 받드는 영연방 왕국이었다.

독립 후 곧 카슈미르 지방의 귀속을 둘러싸고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카슈미르 지역은 한때 잠무 카슈미르 토후국으로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를 구성하였다. 그 번왕은 힌두교도였지만, 주민의 다수는 이슬람교도였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귀속을 둘러싸고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 충돌이 생겼기 때문에, 양국의 군대가 파견되어 전쟁에 이른 것이다. 이 양자의 충돌은 유엔의 중재로 휴전되었다.

이 인도-파키스탄 전쟁 중에, "건국의 아버지"로 파키스탄을 이끈 무하마드 알리 진나 총독이 1948년 9월 사망했다. 또한 리야카토 알리 칸 총리가 1951년 암살됨으로써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958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아유부 칸이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또, 이전의 1956년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어("이슬람 공화국"라고 내걸고 있지만, 헌법의 내용 자체는 정교 분리에 근거하는) 영국연방에서 독립했다. 경제 쪽에서는 5개년 계획이 만들어지고, 고도 경제 성장이 시작되었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경쟁에서 대국으로의 접근을 필요로했다. 따라서 1954년 5월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 월에는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 동남 아시아 집단 방위 조약기구 등과도)의 일원이되었다. 또한 1955년 미국 주도의 반공 동맹인 METO(중동조약기구)에도 가입했다. 아랍 세계에서는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인도가 사실상 친소 비동맹주의의 입장에 서자, 미국도 파키스탄이 서방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냉전 하에서 전략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 이러한 외교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1962년 중소국경분쟁으로 중국과 인도가 충돌이 일어나고 이런 가운데 아유부 칸 군사 정권은 인도와의 경쟁 관계에 있는 중국에 접근하여, 카슈미르 문제를 유리하게 풀려고 하였다. (이 때 협상에서 외무 장관으로 활약한가 나중에 대통령이 된 줄피카르 알리 부토였다.) 이렇게 영토 문제를 재연하여, 1965년부터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이 때에도 유엔의 중재로 휴전을 하였으며, 소련의 중재 하에 타쉬켄트 선언이 발표되었다. 어쨌든 이 전쟁에서 파키스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에서 아유부 칸과 부토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외상 사임 후 부토 파키스탄 인민당을 창당했다.

5. 이슬람[편집]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 자체를 국가의 주 설립 목적으로 삼고 건국된 국가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무슬림들이 모여 만든 나라라고 할 수 있기에, 이슬람교가 국가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타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며 이슬람 율법과 샤리아가 헌법이나 민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파키스탄의 국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 또한 이슬람 율법학자들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으며, 파키스탄의 건국 세력 역시 압도적 다수가 절대적인 무슬림들이었다.

1949년 3월에 발표된 헌법 내용에는 유일신이 만물의 주권자이며, 파키스탄은 무조건적으로 이슬람 국가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파키스탄은 단순히 자국을 확고히 이슬람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인근의 국가들까지 이슬람화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전세계의 이슬람화와 세계적인 이슬람 조직체를 창설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는 1970년대에 이슬람 협력기구(OIC)가 출범하면서 일부 이루어졌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는 건국 직후부터 사회 전반에 강력한 이슬람 율법을 강요했는데, 서파키스탄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반발이 적었던 반면, 벵골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파키스탄 지역에는 속세주의를 추구하고 민족을 종교보다 우선시했던 벵골의 전통적 엘리트층들이 다수 모여 살고 있었기에 지나친 생활의 종교화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슬람 정당이었던 자마트-에-이슬라미는 파키스탄이 완전한 이슬람 국가라고 선포한 마당에, 벵골의 지역적인 민족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1971년에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자마트-에-이슬라미는 파키스탄 군대 편에 서서 벵골의 민족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첫 총선 직후, 제헌 의회에 의하여 1973년에 첫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는 파키스탄이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내용과, 그리고 이슬람교가 파키스탄의 국교라는 내용이 동시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모든 민법과 형법이 이슬람 율법에 맞추어져야만 하며 이슬람 경전인 쿠란과 수나를 능가하는 그 어떠한 법적 권위도 없다고 못박아놓았다. 이 헌법에는 샤리아 법원과 이슬람이념위원회 등 이슬람 경전이나 율법 등을 해석하는 자체적인 종교기관의 창설도 의무토록 해놓았다.

한편 좌파 성향을 띠고 상대적으로 속세주의를 추구했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당시 보수적인 이슬람 세력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니잠-에-무스타파’ 등 샤리아법에 의하여 통치되는 완전한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는 극단주의 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부토 총리도 어쩔 수 없이 일부 요구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부토 총리를 죽이고 권좌에 오른 지아 대통령은 아무래도 종교적인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권력을 탈취했기에, 이슬람교에 친화적일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의 요구를 맞추어주기 위하여 이슬람 율법을 강화하고 샤리아법을 전면 시행하였다. 지아 대통령은 독립적인 샤리아 법원을 창설하였고, 이슬람 율법에 통달한 배심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울라마’라고 부르는 이슬람 법학자들과 이슬람 정당들의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특히 이슬람 부흥주의의 한 교파인 데오반드파와의 협력을 굳게 하였다. 이 때문에 데오반드파, 즉 후의 살라피즘의 세력이 굉장히 강해졌고, 지아 대통령이 수니파를 가까이 하고 시아파를 배척하자 점차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심해졌다.

퓨리서치센터에 의하면 파키스탄의 국민의 대다수가 샤리아법을 파키스탄의 공식 법으로 제정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전했다. 또한 파키스탄이 이집트, 인도네시아, 요르단 등 타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서도 종교색이 강하여 심지어 국적보다도 종교를 우선시한다고 전했다.

6. 행정구역[편집]

파키스탄은 기본적으로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전국을 4개의 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4개의 주에는 크게 펀자브 주,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 신드 주, 마지막으로 발루치스탄 주 등이 있다. 또한 길기트발티스탄과 아자드 카슈미르가 속한 2개의 자치구역이 있으며, 수도인 이슬라마바드를 둘러싼 수도권 지역을 연방구역으로 따로 분리하여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현재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와의 분쟁 지대인 카슈미르 지역의 서부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고 있으며, 이들을 특별 관리하기 위하여 아자드 카슈미르와 길리트발티스탄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에는 파키스탄 헌법을 해석하면서 길기트발티스탄에게 반쯤은 주의 지위를 갖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자치 정부를 구성하고 지역의회를 창설하도록 허가하며 실효적인 지배를 강화하려 들기도 했다.

7. 자연환경[편집]

7.1. 지리[편집]

파키스탄은 그 광대한 국토 덕에 기후대가 매우 다양하며, 여러 종류의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다. 파키스탄의 영토는 881,913km2에 달하며, 프랑스와 영국의 육지 영토를 합친 것과 맞먹는 크기이다. 세계에서는 33번째로 거대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이 영토 순위는 카슈미르 지방을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일부 변동이 있기는 하다. 파키스탄은 아라비아해와 오만 만에 약 1,046km의 해안선을 접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는 2,430km, 중국과 523km, 인도와 2,912km, 이란과 909km로 총 6,774km의 육지 국경을 가지고 있다. 오만과는 해상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타지키스탄과는 분리되어 있다. 파키스탄의 지리적 위치는 남아시아, 중동, 중앙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지질학적으로 파키스탄의 신드 주와 펀자브 주는 인도 판에 걸쳐 있으며, 발루치스탄 등 타 지역들은 대부분 유라시아 판의 이란 고원 지역에 올라타 있다. 또한 인도와의 접경 지역은 인도 판과 유라시아 판이 만나는 접경지이기 때문에, 종종 격렬한 지진 활동이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 지진 발생율, 그리고 지진의 규모 또한 히말라야 전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것이다.[50] 남부 지방에는 모래가 깔린 해안선이 있으며, 북부에는 만년설이 덮인 험준한 산맥이 있는 등 지역에 따라 자연환경이 천차만별이며, 사막, 숲, 언덕, 평원에 이르는 다양한 지형들이 공존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크게 3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북부 고지대, 인더스 강 평원, 발루치스탄 평원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북부 고지대는 카라코람 산맥, 힌두쿠시, 파미르 산맥 등 높디높은 산맥들이 뻗어있으며, 세계 최고봉들 여럿이 이 지역에 밀집해 있어 해발 8,000m가 넘는 14개의 산봉우리들 중 5개가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덕분에 전세계에서 산악인들이 몰려오기도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산이 8,611m의 K2나 8,126m의 낭가 파르바트 등이 있다. 발루치스탄 평원은 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에는 타르 사막이 있다. 한편 길이가 1,609km에 이르는 인더스 강과 인근 평지대는 카슈미르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아라비아해까지 흐르며, 이 지대 인근은 상대적으로 비옥한 편이다.

기후는 열대부터 온대까지 다양한 편이며, 해안가 남부 지방에는 건조 기후도 있다. 몬순 기후도 존재하여 어떤 곳에는 우기 때에 심한 홍수가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하며, 건기 때에는 아예 강우가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파키스탄에는 4개의 계절이 뚜렷하게 존재하는데, 춥고 건조한 겨울이 12월부터 2월까지 있으며, 덥고 건조한 봄이 3월부터 5월까지, 우기이자 몬순 기간인 여름이 6월부터 9월까지, 그리고 강우량이 점차 줄어드는 더운 가을이 10월부터 11월까지 존재한다. 강우량은 연마다 편차가 심한 편이고, 이 때문에 가뭄과 홍수가 연달아 발생하는 것이 흔하다. 특히 최근 2022년에는 사상 최악의 가뭄을 겪었고, 가뭄이 끝나자 평소보다 2배에서 8배 이상의 폭우가 내렸으며 이로 인하여 국토의 75%가 침수되었고 천백명의 사망자와 수십만명의 수재민이 발생하였다.

7.2. 기후[편집]

기후는 세가지 형으로 구분된다.
  • 북부 산악 지방 : 고산성 기후
  • 중앙의 펀자브 지방 : 스텝 또는 온대하우(溫帶夏雨) 기후와 여름에는 몬순의 영향으로 기온이 높아지고 비가 내리며, 겨울은 서늘하다.
  • 남부, 남동부 (신드지방, 타르사막), 남서부(발루치스탄) 지방 : 스텝과 사막의 건조한 기후.

8. 인문환경[편집]

8.1. 민족[편집]

파키스탄의 주요 민족은 펀자브인으로, 전체 인구의 44.7%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파슈툰인들이 약 15.4%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드인들이 14.1%, 사라키인들이 8.4%, 인도에서 이민을 오고 우르두어를 주로 사용하는 무하지르인들이 7.6% 정도를 차지하고 발루치인들이 3.6%, 나머지 6.3%는 브라후이, 힌드코완 등 여러 소규모의 민족들이 섞여 모여 살고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는 7백만 명에 달하는 파키스탄 이민자들이 퍼져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6번째로 많은 규모의 해외 유출인구를 보유한 것이기도 하다.

8.2. 언어[편집]

파키스탄에서는 최소 60여 개에 달하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대부분이 지역적으로만 사용되는 언어이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는 무슬림들의 주요 언어이자 사실상 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이다. 그 외에도 영국의 지배 영향이 있었는지 영어도 사용하며, 공적 자리나 기업체에서는 영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영어는 파키스탄에서 파키스탄 특유의 발음이나 단어가 첨가되어 약간 변화하기도 했는데, 이를 파키스탄식 영어라고 부른다. 영어를 제하고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에는 펀자브어가 있으며, 파키스탄 인구의 38.78%가 첫 모어로 배우는 언어이기도 하다. 또한 서부 펀자브의 남부 방언인 사라이키어, 카이버파크툰크와 지역의 방언인 힌드코어 등도 있으며, 카이버파크툰크와 지역의 공용어는 파슈토어이다. 신디어는 신드주에서 주로 사용되며, 발루치스탄에서는 발루치어가 주로 사용된다. 드라비다 언어인 브라후이어도 발루치스탄 지역에서 주로 쓰인다. 카라치에는 구자라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외에 길기트발티스탄 지역에서는 시나어, 발티어, 부루샤스키어 등이 사용되며, 아자드 카슈미르 지방에서는 파하리어, 고지리어, 카슈미리어 등이 주로 사용된다.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지만 문맹률이 매우 높다고 하며, 국민의 절반 이상이 문맹인이다.

8.3. 종교[편집]

파키스탄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다. 다만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국민들이 어떤 종류의 종교든지 믿는 것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도록 규정은 하고 있다. 또한 종교 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 포교하는 것, 그리고 종교고백하는 것도 가능은 하도록 두고 있다.

파키스탄 인구의 96%가 이슬람교를 믿을 정도로 이슬람교의 세가 압도적이며, 그 다음이 1.85%의 힌두교도, 1.5%의 기독교도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시크교도, 불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의 소수 분파 등이 조금씩 존재한다. 또한 무신론자들과 범신론자들도 조금씩은 존재하지만, 이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0.5%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

9. 경제[편집]

9.1. 농업[편집]

파키스탄은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농업 국가였으나, 이후 경제발전기를 거치면서 현재는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아지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농업은 전체 GDP의 20.9%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생산되는 양 자체가 압도적이기에, UN의 보고서에 의하면 파키스탄은 2005년 기준으로 무려 21,591,400톤의 밀을 생산했고, 이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생산되고 있는 20,304,585톤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이며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되는 24,557,784톤보다 약간 적은 수치이다. 이 때문에 인구 상당수가 농업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파키스탄 전체 고용인구의 약 43.5%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또한 가장 많은 양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 부문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에서는 여러 종류의 제조품들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데, 특히 농업에서 생산되는 솜 등을 이용한 공산품 종류가 많다. 파키스탄은 세계 5위의 솜 생산국이기도 하며, 1950년대에 170만 베일의 솜을 생산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무려 1,400만 베일의 솜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사탕수수 생산도 충분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이며, 세계 4위의 우유 생산국이기도 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녹색혁명이 일어나면서 대규모의 개량 품종들이 파키스탄에 도입되었고, 이로 인하여 토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밀과 쌀 생산이 폭증하기도 했다.

9.2. 산업[편집]

공장 산업은 파키스탄에서 세 번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GDP의 약 20.3%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고용 인구의 13% 정도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대규모 제조업(LSM)이 주요 부문이며, 전체의 66%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 소규모 제조업들이 조금씩 있다. 파키스탄의 시멘트 산업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의 수요로 인하여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2013년에는 약 7,708,557톤의 시멘트를 수출하기도 했다. 2012년과 2013년에는 시멘트 산업이 워낙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파키스탄 경제권 전체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산업으로 떠오르기조차 했다.

직물 산업도 시멘트 산업 못지않게 굉장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부문들 중 하나이다. 아시아 내에서는 파키스탄이 8위 규모의 직물 수출국이며, 전체 GDP의 9.5%를 차지하고 있으며 약 1,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4번째로 거대한 솜 생산국이며 전세게 직물 생산력의 5%에 달하는 거대한 직물 공장을 두고 있기에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인도 다음가는 직물 생산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중국이 파키스탄 직물을 수입하는 최대 수입국이나, 다만 완제품을 사는 경우는 별로 없고 솜 원료나 가공하기 전의 직물들만 수입하는 편이다.

9.3. 서비스업[편집]

서비스업은 전체 GDP의 58.8%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은 타 개발도상국들과 비슷하게 소비 중심의 사회이며, 이덕분에 서비스업의 성장률이 농업이나 산업 부문의 성장률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서비스업은 2014년 기준으로 전체의 54%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고용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농업과 제조업을 떠받치는 기본적인 산업이기도 하기에, 현재 파키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파키스탄의 IT 산업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분야들 중 하나이지만, 타 경제 선진국들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미비한 점이 많아 세계경제포럼은 전체 139개국들 가운데에 파키스탄은 110위 정도에 올려놓았다.

2020년 5월 기준으로 파키스탄에는 약 8,200만 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있었으며, 세계에서 9번째로 인터넷 사용자가 많은 국가로 떠오르기도 했다. 현재 추세로만 성장할 경우 파키스탄의 ICT 산업은 2020년 경에 이미 100억 달러를 넘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통신업, 컴퓨터, 정보통신업 등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어떤 분야에서는 심지어 중국보다도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9.4. 관광업[편집]

파키스탄은 워낙 다양한 수의 문화와 민족, 풍경들을 가지고 있기에 2018년 기준으로 약 66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관광을 즐겼다. 다만 이는 히피 문화가 절정을 누렸던 1960년대와 70년대보다는 훨씬 적어진 규모인데, 이때는 수많은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이 터키와 이란 등지를 통하여 파키스탄으로 활발히 유입되어 페샤와르, 카라치, 라호르 등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관광을 즐겼다. 그러나 이란 혁명이 일어나 이란을 통한 통로가 끊기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 인근의 파키스탄마저 치안이 위태롭게 되자 이들의 유입도 급격히 감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관광지들은 굉장히 다양하여, 남부의 맹그로브 숲에서부터 북부의 히말라야에까지 온갖 종류의 자연지형들이 깔려 있다. 그 외에 탁실라 등의 불교 유적도 굉장히 유명하고, 하라파나 모헨조다로 등 세워진 지 5,000년이 넘은 인더스 문명의 고유적지들도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또한 7,000m가 넘는 고봉들의 수도 굉장히 많은 편이다. 파키스탄 북부에는 고대 요새들의 유적들도 굉장히 많은 편이며, 심지아 알렉산더 대왕 시절부터 내려온 유적들도 있다. 파키스탄의 문화적 수도인 라호르는 무굴 제국 시대의 문화유산들도 굉장히 많이 지니고 있어 인기가 많은 편이다.

2006년 10월에 가디언지는 파키스탄의 관광업 활성화를 목적으로 ‘파키스탄의 5대 관광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5대 관광지에는 불교 성지 탁실라, 문화 중심지인 라호르, 히말라야의 카라코람 고속도로, 독특한 문화를 지닌 카리마바드, 거대한 산악호수인 사이풀 물룩 호수 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파키스탄의 관광업이 열악한 치안 탓에 딱히 나아지지 못해서, 세계경제포럼은 파키스탄을 전체 141개국들 중 125위라는 매우 낮은 순위에 올려놓았다.

10. 교통[편집]

교통은 카라치에서 인더스강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라호르·라왈핀디를 거쳐 페샤와르를 지나 카이바르 고개에 이르는 옛 실크로드가 간선도로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하고 오래된 철도망이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의 세 나라에 나뉘어 있는데 이것은 영국령 시대에 부설된 것들이다. 파키스탄 철도의 총연장은 8,163km로 주로 1,676mm 궤관의 광궤이다. 1960년 이후 계속적으로 전철보다는 디젤기관차를 채용하는 움직임이 강하다. 철도도 간선도로와 같은 방향으로 건설된 노선의 교통량이 가장 많다. 대중 교통수단으로는 택시, 버스, 오토 릭샤, 마차가 있다.[82]국제공항은 시알코트 국제공항이 있다.

11. 문화[편집]

파키스탄 사회는 굉장히 계층적인 사회로, 지역색이 대단히 강한 편이며 이슬람 율법이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이슬람 색채에 강하게 물들어 있는 종교적인 사회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가족 형태는 대가족 형태이나, 최근 들어서는 경제 성장과 중산층의 대두로 인하여 핵가족의 형태가 점차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파키스탄의 전통의복은 남성과 여성 모두 ‘샬마르 카미즈’라고 부르며, 남성들 사이에서는 청바지, 셔츠 등 서구식 의복들도 점차 유행하고 있다. 최근들어 파키스탄의 중산층 인구는 3,500만 명 수준까지 증가하였으며, 상류층과 중상류층도 크게 증가하여 거의 1,700만 명에 이르러 이 흐름에 맞추어 사회의 주도권도 시골의 지주들로부터 도시의 신흥 엘리트층들에게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파키스탄의 축일에는 라마단, 크리스마스, 부활절, 디왈리, 홀리, 이드 알피트르, 이드 울 아즈하 등이 있다.

11.1. 의복[편집]

파키스탄의 전통복은 ‘샬와르 카미즈’라고 부르며, 펀자브, 신드, 발루치스탄, 카이버파크툰크와 등 4개의 주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없이 모두가 즐겨 입는다. 다만 지방별로 조금씩 복식에 차이는 있는 편이다. 샬와르 카미즈는 실크, 솜 등으로 만들며, 색깔과 디자인, 그리고 의복의 재질 등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굉장히 종류가 다양하다. 최근들어서는 조금씩 현대화와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특히 남성들을 중심으로 회사나 사회적 모임, 혹은 학교에서 서구식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흔해지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패션 산업도 점차 활기를 띠고 있는데, 현재는 주로 전통복과 서구 양복을 혼용하여 입고 있는 편이며, 아직까지는 특히 시골 지방을 중심으로 서구 복식을 입기보다는 전통복을 오히려 더 즐겨 입고 있는 편이다. 라호르에는 ‘파키스탄 패션 디자인 협회’도 개설되어 있으며, 이 협회에서 PFDC 패션위크를 개최하며 카라치에 본사가 위치한 패션 파키스탄 협회는 패션 파키스탄 위크를 개최하기도 한다. 파키스탄의 첫 패션위크는 2009년 11월에 처음으로 열렸다.

11.2. 미디어[편집]

21세기 이전까지, 파키스탄의 중심 미디어는 국영기업인 파키스탄 텔레비전(PTV)와 파키스탄 라디오(PBC), 그리고 몇몇 개인 소유의 영리 신문 등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는 인터넷의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24시간 운영하는 뉴스 미디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거대한 규모의 텔레비전 채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에 불구하고 아직까지 언론의 자유가 높은 편은 아니라서, 국경없는기자회는 2016년에 파키스탄의 언론자유지수를 전체에서 147위 정도로 낮게 잡기도 하였다. 다만 이와 동시에 ‘정치인들의 스캔들이나 가십들을 보도하는 데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BBC는 파키스탄의 미디어들을 보고 ‘남아시아에서 가장 말이 많다’라고 평했으며, 이같은 활발한 스캔들 폭로 덕에 정치인들의 부패를 폭로하는 데에 한 몫을 하기도 했다.

파키스탄 영화계는 세계적 영화 중심지인 할리우드의 이름을 따와서 별칭으로 ‘롤리우드’, ‘카리우드’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카라치, 라호르, 페샤와르 지역을 중심으로 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인도의 볼리우드 계열의 영화들은 1965년부터 2008년까지 파키스탄 내 상영이 중단되었으나, 점차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2008년에 마침내 제재가 풀렸다. 또한 우르두어로 제작되는 드라마가 여러 편 제작되고 있으며, 1990년대 이래 여러 차례 장편 드라마를 내놓기도 하면서 수많은 유명 배우들을 배출한 적도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팝 음악과 디스코가 전성기를 누렸으며,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영국의 영향을 받아 락 음악이 세를 불렸고, 2000년대 들어서는 잠시 동안 헤비메탈 음악이 대중의 인기를 끈 적이 있다.

11.3. 스포츠[편집]

현재 파키스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들은 대다수가 영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대부분 영국 식민시기에 전파되었다. 파키스탄의 국민 스포츠는 필드 하키이며, 팀의 실력도 좋은 편이라서 1960년, 1968년, 1984년에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적도 있다. 또한 1971년, 1978년, 1982년, 1994년에 열린 하키 월드컵에서도 4번이나 우승을 차지하였다.

영국에서 전래된 게임인 크리켓도 굉장히 인기가 많다. 최근들어서는 오히려 필드 하키보다도 인기를 많이 끌면서, 크리켓 월드컵, U20 크리켓 월드컵, 크리켓 챔피언십 등 여러 차례 세계 크리켓 경기에서도 메달을 많이 획득한 바 있다. 파키스탄 크리켓 국가대표팀은 1992년에 열린 크리켓 월드컵에서 승리한 적이 있으며, 2007년, 2009년에는 20세 이하의 선수들만 참여하는 크리켓 국제전에서 승리한 적도 있다. 다만 2009년 3월에 군대가 투어 경기를 온 스리랑카 크리켓 대표팀을 공격하면서 2015년까지 단 한 번도 국제전이 열리지 못했고, 2015년 3월에야 짐바브웨 대표팀이 간신히 투어 경기를 파키스탄 현지에서 진행하는 것에 합의하면서 겨우 이에 벗어날 수 있었다. 2017년에는 결승전에서 인도를 꺾으며 크리켓 챔피언 트로피를 거머쥐기도 했다.

파키스탄에서 2번째로 대중적인 스포츠는 프로 축구로, 파키스탄 축구 연맹에서 주관하고 있다. 파키스탄 축구는 거의 파키스탄 자체보다도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는데, 영국 식민기부터 인기가 많던 축구는 파키스탄이 세워진 지 얼마되지 않아 1947년에 파키스탄 축구연맹(PFF)가 세워졌고,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직접 축구에 관심을 보이며 국민적인 스포츠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파키스탄의 최고 축구 리그는 파키스탄 프리미어 리그이며, 현재 유명한 파키스탄 출신 축구선수들에는 칼리물라 칸, 제시 레만, 무하마드 에사, 하룬 유사프, 무함마드 아딜 등이 있다.

파키스탄은 여러 차례 국제전을 유치한 경험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1989년과 2004년 남아시아 게임을 개최한 바 있으며 1984년, 1993년, 1996년, 2003년 세계 스퀴시 챔피언십을 개최하였고, 1987년, 1996년 크리켓 월드컵, 1990년 하키 월드컵도 개최하였다.

12. 군대[편집]

파키스탄 군대는 상비군의 규모로만 보면 세계에서 8번째로 거대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617,000명의 상비군이 있고 513,000여 명의 예비군이 있다. 군대는 1947년 독립 직후 창설되었으며, 이후 군부가 여러 차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면서 파키스탄 정치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군대의 통수권은 합참회의가 가지고 있으며, 합참의장을 필두로 한 합참본부에서 모든 종류의 군사 업무를 관리하고 있다. 파키스탄 합참본부는 공군본부, 해군본부, 육군본부로 구성되어 있다.

1947년 이래 파키스탄은 4번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 참전한 바 있다. 첫 번째는 카슈미르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이때 파키스탄이 아자드 카슈미르, 길기트발티스탄 등 카슈미르 서부 지방을 얻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반면 인도는 동부 카슈미르 지방을 가져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때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영토 분쟁으로 인하여 1965년에 또다시 카슈미르에서 전쟁이 터졌고, 1971년에는 파키스탄 내부 갈등과 벵골 지역의 이주민들로 인하여 또다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일어나 결국 파키스탄의 패배로 끝나기도 했다. 또한 국경지대인 카길 지역에서 또다시 분쟁이 일어나 1999년에 인도와 전투를 벌였다. 1947년 이래 아프가니스탄과도 국경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아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1961년에는 파키스탄 군대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국경지대 인근에서 몰아내기도 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내정에 개입하면서 소련과 파키스탄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파키스탄 정보국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온갖 힘을 쏟았다.[73] 군 보고서에 의하면 파키스탄 공군이 전쟁 도중 소련 공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파키스탄은 국경분쟁들과는 별도로 UN의 평화유지임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UN의 보고서에 의하면 파키스탄 군대는 UN의 평화유지임무에 에티오피아와 인도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인들을 파병했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자국 군대를 여러 아랍 국가들에도 파병하여 훈련, 조언 임무를 하도록 했다. 정보국과 해군은 주로 이스라엘 군대에 맞서 6일전쟁, 그리고 욤키푸르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공군 조종사들은 6일 전쟁에서 직접 싸우며 이스라엘 전투기를 격추하기까지 하여 시리아 정부에게 감사를 받은 적도 있다. 1979년에는 사우디 왕가의 요청으로 특별군을 동원하여 메카에서 사우디 군대와 함께 특별 작전을 펼쳐 메카의 대모스크를 점거한 신자들을 몰아낸 적도 있다. 1991년에는 걸프 전쟁에 휘말렸으며, 미군 주도의 연합군에 5,000여 명에 달하는 군인들을 파병하여 사우디아라비아 방위에 일조하였다.

13. 정치[편집]

파키스탄은 민주적인 의회 연방공화국이며, 국교는 이슬람교이다. 첫 헌법은 1956년에 채택되었으나, 2년 후인 1958년에 아유브 칸에 의하여 효력이 일시 정지되었고 1962년에는 개헌이 이루어졌다. 완전한 헌법체계의 틀을 갖춘 헌법은 1973년에 도입되었으나, 지아울하크 대통령이 1977년에 또다시 효력을 중지시켰고 1985년에야 다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53] 이 헌법이 바로 현행 헌법이다. 파키스탄의 군부는 민간 정부와 연이어 정권을 번갈아 차지하면서 파키스탄 정치사에 많은 굴곡을 남겼는데, 1958년부터 1971년까지, 1977년부터 1988년까지, 1999년부터 2008년까지는 모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군부 지도자들이 사실상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다만 현재에는 군부가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 있으며, 이덕분에 다당제가 보장되는 의회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권력 분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 평화롭고 성공적인 정권 교체는 2013년 5월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파키스탄의 정치는 주로 사회주의, 보수주의, 제3의 길 등이 주류이다.[54] 2013년에 총선이 열렸고, 현재 파키스탄에는 3개의 주류 정당이 있다. 첫 번째가 중도보수 성향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이고, 두 번째가 중도좌파 성향의 파키스탄 인민당, 마지막이 제3의 길 성향의 파키스탄 정의운동이다.
  • 국가원수 : 파키스탄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으로, 헌법 41조 3항에 의하여 상원의원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서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적인 최고지도자이며, 파키스탄 군대의 민간 군통수권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실권은 거의 파키스탄 총리에게 있으며, 군통수권 또한 총리에게 있다. 총리가 자신이 임명할 후보들의 자질을 평가한 다음, 그 명단을 대통령에게 재가해달라고 올리면 대통령은 그저 이를 허가해주기만 할뿐, 실질적인 권한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이 이전보다도 굉장히 약화되어 있기에,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하려 할 때에도 무조건적으로 의회와 내각, 그리고 총리의 허가를 받고 행동해야 하기에 타 대통령제 국가들에 비하여 대통령의 권한이 매우 작은 편이다.
  • 입법부 : 파키스탄은 양원제를 채택한 국가로, 상원은 104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원은 342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의원들은 국민들에 의하여 직접선거로 뽑히며, 이 국민을 대표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에 상원보다 실질적인 권한은 더 큰 편이다. 헌법에 의하면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하원에는 최소 70석 정도가 소수 정당들에게 배분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상원의원들은 지방의원들에 의하여 선출되며, 모든 주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다만 실질적인 권한은 하원에 비하여 작다.
  • 행정부 : 행정부의 최고 수반은 총리로, 보통의 경우 하원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지도자가 총리로 선출된다. 파키스탄의 총리는 정부 수반이며, 대통령보다도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국가의 행정권을 총지휘하는 입장이다. 총리는 내각을 임명할 권한이 있으며, 정책들을 심의하고 결정할 권한도 있다. 또한 외국과의 조약 체결, 장,차관보 임명, 비서관 임명 등도 모두 총리의 허가를 받고 이루어진다.
  • 지방정부 : 파키스탄은 4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방정부의 시스템은 거의 비슷한 편으로 국민에 의하여 직접선거로 구성된 지방의회들이 각각 있고 지방의회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지도자가 그 주의 행정장관이 된다. 행정장관은 지방정부를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맡으며, 지역의 내각을 꾸려 그 주의 국정을 책임질 권한이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워낙 지역색이 다른 탓에 각 주의 행정장관들이 모두 다른 당에 속해있는 것이 흔한 편이다. 한편 중앙정부와 총리는 각 주에 비서실장을 임명할 수 있는데, 이 비서실장은 해당 지역의 공무원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지방 의회는 법률을 제정하고 지방의 재정장관이 제출한 예산안을 심의할 수 있다. 한편 대통령은 주지사들을 임명하는데, 이 주지사는 각 주의 상징적인 수반일 뿐 특별한 권한은 없다.
  • 사법부 : 파키스탄의 사법부는 2개의 수직적인 틀로 나누어진다. 상위 법원이 있으며, 하위 법원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최고 사법수장은 대법관이며, 모든 종류의 사법권을 관할할 수 있다. 또한 최고 법정은 파키스탄 대법원이고,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이기에 샤리아 연방법원과 5개의 고등법원들도 따로 존재한다. 파키스탄 헌법에는 사법부가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파키스탄의 고질적인 부정부패 탓에 사법과 행정체계가 완벽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외에 각 지방마다도 지방법원들이 따로 있다.

14. 대외 관계[편집]

독립 이래 파키스탄은 해외 국가들과 활발히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인근의 중국과 관계가 굉장히 친밀한 편이며, 각국 모두 특별관계를 맺으며 서로에 대한 중요도와 관심도가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또한 NATO가 아닌 국가들 가운데 미국의 동맹국이기도 하며, 테러와의 전쟁에도 미국의 편에서 참전한 바 있다. 파키스탄의 주요 외교 정강들은 주로 영토 분쟁, 이슬람 세계 통합, 국가 정체성 확립 등에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타 이슬람 국가들과 관계를 다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건국 이래부터 현재까지 관계가 굉장히 안 좋은 국가들에 속하며, 현재에도 카슈미르 분쟁 등 영토 문제가 갈등의 씨앗으로 남아있고 이 지역에서는 무려 4번이나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바로 남쪽에 붙어있는 인도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란과 터키 등 인근 이슬람 국가들과 관계를 가까이 유지하고 있으며, 이덕분에 파키스탄 외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들 중에 이란과 터키가 최우선 순위에 들어가기도 할 정도이다. 그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

파키스탄은 핵확산방지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핵보유국이기에 IAEA에서도 상당히 영향력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최근들어 파키스탄은 무기용 핵분열 물질 생산금지 조약에서 탈퇴하였는데, ‘해당 조약이 파키스탄을 특정하고 있다’라고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20세기 들어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자, 라이벌 의식과 균형 의식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에는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해외에서는 세계 안보를 이유로 점차 파키스탄에게 핵무기를 감축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감축의 움직임은 없다.

파키스탄의 지정학적 위치는 세계 석유 공급의 핵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를 통한 원유 수송로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2004년에 파키스탄 상원의원은 ‘파키스탄은 각 국가들의 주권, 쌍방주의, 상호주의, 상호불간섭주의 등을 외교의 기본 정책으로 삼고 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UN의 회원국이며, UN에 영구 대사를 두고 있다. 또한 무슬림 세계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쏟고 있는 만큼 ‘계몽 현대주의’를 이슬람 세계에 퍼뜨리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파키스탄은 커먼웰스, 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 G20 개발도상국, ECO 등의 회원국이다.

파키스탄은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했고, 이덕분에 1950년대에는 소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일어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파키스탄은 적극적으로 미국의 편에 서서 소련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이 망하고 새롭게 들어선 러시아와는 1990년대 들어 극적으로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여러 부문에 걸쳐 협력이 크게 늘어났다. 다만 냉전 시기 전통적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는 오히려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이 핵을 개발하는 것에 미국이 제재를 대량 부과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금융과 무기 지원을 받는 대가로 미국의 편에 서서 중동과 남아시아 지방의 핵심적 동맹국으로 서기도 했다. 다만 초기에는 테러와의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양국 관계가 호전되는 듯 싶었으나, 나중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꼬이면서 다시금 악화하기 시작하였다.

파키스탄은 이스라엘과는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가끔씩 몇몇 이스라엘인들이 관광비자로 파키스탄을 찾기도 한다. 다만 터키를 중재자로 삼아 양국간 일부 협상이 열리기는 했다. 파키스탄은 아르메니아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나, 파키스탄 국내에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존재한다. 한편 방글라데시와는 초기에 전쟁까지 벌였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현재에는 관계가 급격히 호전되어 나쁘지 않은 편이다.[62]

파키스탄은 인구 중 신도 수의 비율로 볼 때, 인도네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이슬람 국가이다. 그리고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유일한 이슬람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키스탄은 매우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펴는데, 특히 핵무기 개발, 원자로 건설, 군수 물자 거래, 기타 국가 안위에 필수적인 이슈들에서 그렇다. 파키스탄은 세계의 주요 원유의 공급경로에 위치하고 있고, 원유가 풍부한 중앙아시아에 가까워, 전략적으로 지정학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회의 기구의 중요회원국이며, 미국은 파키스탄을 주요 주요 비NATO 동맹국(major non-NATO ally)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매우 잘 훈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세계 8위의 국방력을 지닌다.

1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