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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한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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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한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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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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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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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한명회]]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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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 생애 초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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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년) 음력 10월 25일 [[한성부]]에서 [[조선]]의 개국 공신으로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한상질의 손자이며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에 증직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와 이조참판 겸 예문관 직제학 이적의 딸인 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모친 여주이씨 부인이 수태된 지 7개월 만에 태어났다 하여 칠삭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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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전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배에는 태성과 두성 모양(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한상질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화령이라는 국호와 조선이란 국호 중 조선을 낙점 받아왔다. 한상질은 처음 경주 이씨 문하시중 월성부원군 이성림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딸만 1명 두고 요절하였으므로, 청풍송씨 송신의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이 곧 한명회의 아버지 한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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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그가 태어날 당시 몸이 빈약하여 일찍 죽으리라 생각하고 방치하였으나 어느 늙은 여종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였다. 그러나 종조부 한상덕은 그의 관상을 보고 '이 아이는 기우가 예사롭지 않으니 필경에는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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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 유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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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그는 [[고려][ 때 시중을 지낸 한강의 후손으로 세조의 사돈이었던 한확과는 9촌숙질간이다. 한확은 한악의 넷째 아들 한방신의 증손이었고, 한명회는 한악의 둘째 아들 한공의의 4대손이었다. 그가 태어난지 얼마 뒤 동생 한명진이 태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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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그는 10개월도 안되어 태어나 병으로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몸 전체가 완전치 못하고 병약하여 온 집안이 거두려 하지 않으니 한 늙은 여종이 그를 거두어 솜털 속에 싸서 정성껏 보살폈는데, 점점 자라서 몇 달 만에 웃고 안아 볼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또한 그가 태어날 때 배 위에 검은색 별 모양 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몸에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는 소문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 명진과 함께 고아가 된다. 한학을 수학하였지만, 불행한 가계와 빈한함, 작은 체구로 주변의 멸시와 놀림을 받으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민첩하였는데, 그의 종조 할아버지 한상덕은 그를 가리켜 집안의 천리마가 될 것이라 예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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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그는 종조 할아버지들인 한상경과 한상덕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종조 할아버지 한상환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자망산을 찾아가 류태재의 문하생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친구 권람 등을 만나 사귀었는데, 강원도 자망산의 유학자 류태재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사가 서거정 등을 만나 사귀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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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 청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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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글을 읽어서 성취한 바 있었으나 번번히 과거에 실패하여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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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재상 황보인이 한명회를 보고는 큰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이에 종조부인 참판 한상덕이 "그(황보인)는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니 만약 혼례를 받아들인다면 부귀하게 될 것"이라며 수락할 것을 권고했으나 한명회는 "처가의 권세에 힘입어 부귀 영화를 바라보겠습니까. 이는 저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며 거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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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개성에 유람차 놀러 갔을 때 영통사의 한 노승이 그를 보고 " 그대의 두상에 광채가 있으니 필연코 귀할 징조라" 하였다. 당시 그는 이 노승의 예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 두 종조부가 별세하자 중추원사 민대생이 그를 거두어 사위로 삼았다. 민대생의 장녀인 부인 황려부부인에게서는 1남 4녀가 태어났는데, 이 중 셋째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 넷째 딸이 성종비 공혜왕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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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여러 번 과거에 떨어지자 주변에서는 그를 위로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궁달은 다 때가 있는 법인데 사군자가 되어서 어찌 부유, 속사들의 말 한마디에 실망하고 비통하기를 즐겨 하겠는가?'라며 개의치 않고 웃어 넘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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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같이 불우한 처지였던 권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둘이 함께 오랫동안 마차에 책과 술을 싣고 전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하고 유람을 다녀오기도 했다. 관례를 치른 뒤에도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고, 오랫동안 실의의 나날을 보내며 권람과 더불어 전국을 떠돌며 산천을 주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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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 [[정치]]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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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 음관과 [[수양대군]]의 측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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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어려서 부모를 여읜데다가 집안에 가산이 없었으므로 개국공신의 후손이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청년기 역시 불우하게 지냈다. [[자(이름)|자]]를 자준이라 했는데, 어려서부터 사귄 친구 권람 등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다가 교리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를 알게 되었고, 수양대군을 소개받았다. 수양대군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게 된 그는 수양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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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글을 읽어서 학업을 쌓았으나 오래 과거를 보지 않다가, 뒤늦게 여러번 과거 시험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하고 가세도 빈한해져 그는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다. 1452년(문종 2년) 음보로 처음으로 출사하여 송도에서 경덕궁직이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수양대군]]과 자주 교류하였고 뒤에 그의 모사로 활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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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경덕궁직으로 있을 때 그는 역시 같은 경덕궁직에 있던 무사 홍달손, 홍윤성, 양정 등을 만나 사귀게 되는데, 한명회는 이들 30여 명을 수양대군에게 적극 천거하여 이들의 인맥을 통해 거사를 일으킬 병력을 모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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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 집권 계획 준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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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조선)|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이 집권하자,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과 자주 만나며 집권 계획을 역설, 무사 홍달손 등을 추천하여 그의 심복이 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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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그는 강력한 [[군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강력한 지도자와 엄격한 법 집행만이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느슨한 법집행과 온정주의는 도적과 부패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었다. 한명회의 계책을 들은 권람은 수양대군을 찾아가 이를 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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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권람의 진언을 받은 수양대군은 그를 불러들였고, 한명회는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였다. 한명회의 진언을 들은 수양대군은 '어찌 진즉 만나지 못했을까? 지금 주상께서는 비록 유충하지만 곁에서 잘 보필하면 수성은 할 수는 있는데, 대신들이 간교하여 안평대군 이용에게 포섭되어 선조의 충자를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니 조종의 선령이 장차 어디에 의탁하시겠는가?'하고,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한명회는 이에 감격하여 반정의 책략을 남김없이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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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수양대군은 처음 집권을 위한 그의 계획에 머뭇거렸으나 이내 집권을 결심하고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람을 모으게 된다. 이후 수양대군과 의기투합하여 이런 저런 사람을 주변으로 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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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 계유정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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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1453년(단종 1년) 군기감녹사가 되고, 1453년초 수양대군의 심복 참모로서 비밀리에 사람과 재물을 동원, 계유정난을 일으켜 [[한성부]]를 점령한다. 이어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의 집권에 큰 공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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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그해 10월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의병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한다고 하자 실패를 걱정하고 군사들은 우왕좌왕하였다. 그러자 그는 칼을 빼어 들고 큰 소리로 말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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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한명회의 독려에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날 사병들을 동원하여 비밀리에 매복시키고, 그날 저녁 한성부를 점령하였다. 홍윤성과 홍달손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합류,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을 습격하여 이들 일파를 제거하였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 중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막강한 권력에 반발하는 뜻에서 한명회를 지지하는 여론도 조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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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이어 한명회는 모사가들을 시켜 잔존 세력을 숙청한 후, 직접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에 찾아가 김종서 등과 황보인 일족을 참살케 한 후 군기녹사·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 1등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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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 [[세조찬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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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1456년([[세조(조선)|세조]] 2) 2월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세조 3부자를 연회장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세종대왕]]으로부터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한명회는, 연회장에 별운검으로 임명된 성승, 김문기, 하위지 등을 의심하고 이들의 출입을 차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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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 1456년 5월에는 명나라 황제가 태감 윤봉을 보내서 특별 선물로 그에게 관복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육신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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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6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하자 운검들이 출입하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미구의 사태를 대비해,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광연루에 사신이 많아서 자리가 좁다는 이유로 세자는 연회에 참석하지 말 것과, 홍달손과 홍윤성을 시켜서 병력을 동원할 것이니 운검의 제장들도 입시하지 못하게 하기를 주청하여 세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이를 윤허하였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운검을 차고 곧장 들어오려 하기에 운검은 안 들어와도 된다며 제지하였다. 이에 거사의 실패를 우려한 운검의 병력들이 그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민첩하게 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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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 1456년 초부터 그는 정창손에게 사위를 설득하게 했는데, 그해 6월 2일, 사육신과 함께 세조 3부자 척살에 가담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의 가담자들을 폭로함으로써 성삼문, 하위지, 김문기 등을 체포하였다. 바로 이들을 국문한 후 처형하고, 800여 명의 관련자들을 처형했으며, 수천 명을 [[유배]]시켰다. 사육신이 사형된 후 사육신의 의거를 진압한 공로로 승정원좌승지를 거쳐 그해 겨울 도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이조판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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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셋째 딸을 세조의 차남 해양대군에게 출가시켰으나, 셋째 딸은 아들 인성대군을 낳고는 산욕으로 요절한다. 외손자 인성대군 마저 요절하면서 한명회는 해양대군과는 다소 껄끄러운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해양대군이 곧 예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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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 정치 활동과 권력 강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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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1463년 4도 순찰의 명을 받고 평안도, 강원도, 함길도, 황해도를 순찰하였다. 그가 순행을 갈 때 특별히 세자가 나와서 그를 전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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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그의 빈인 수빈 한씨는 궁궐에 살아도 좋다는 시아버지 세조의 배려를 사양하고 사가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인수대비의 친정과는 10촌도 더 차이가 나는 먼 친척이었으나 인수대비의 집에 자주 방문했는데, 그는 수빈 한씨에게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명회는 인수대비에게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제의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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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그는 우선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권람은 일찍 요절한 그의 동생 한명진의 처남이기도 했다. 한편 자신의 손자 한경침을 다시 사위이기도 한 성종의 후궁 소생 서녀 공신옹주와 혼인시켜 3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관계를 형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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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 혈과 그의 넷째 딸을 혼인시키는데, 후에 예종이 일찍 죽자 한명회는 신숙주, 정창손 등과 함께 자을산군을 추대하여 성종으로 등극시키게 된다. 또한 권람, 신숙주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인척 관계에 의한 요직 장악이라는 크나큰 인사 폐단을 낳아 조선왕조의 기강을 흐트러 놓는 원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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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 좌의정 재임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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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 1474년(성종 5년)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 1475년 초 사은사로 연경에 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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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1475년(성종 5년) 평안남도 병마절도사를 혁파하자는 건의가 올라와 성종이 회의를 소집하자, 모두가 혁파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듣고 급히 돌아와 이를 강력 반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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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 군사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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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 변방 수비와 국방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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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그는 세조 집권 초반부터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고, 해안가에도 성곽을 쌓고 병력을 보내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하며 미구에 있을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56년부터 [[단종(조선)|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처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세조가 듣지 않았다. 1457년(세조 2년) 초 숭정대부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한 뒤, 상당군에 봉군되었다. 그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해 겨울 해양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한 세자책봉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의 연경에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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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 세자 책봉을 성사시키고 1458년 봄에 귀국,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여름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의 3도에 흉년이 들어, 그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3도 순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어 구호물자를 싣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순시하며 백성들을 구휼하고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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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또한 병조판서 재직 중 평안도와 함경도에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과 야인 부락을 토벌하고, 북변을 수습한 뒤, 북방에 축성하여 방어를 확실히 하고 되돌아왔다. 그 뒤 황해·평안·함길·강원도 도체찰사 등을 역임했다. 그해 숭록대부가 되었고, 1458년(세조 3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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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1460년 그의 병권 장악을 경계한 세조는 평안도와 함길도, 강원도의 도체찰사 직은 신숙주에게 넘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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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다시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에 임명되고 판병조사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이 되었으며,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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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 === 좌의정 해임과 군사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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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 1476년(성종 7년), 자신에 대한 탄핵과 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청했지만, 성종은 만류하다가 음력 3월 29일 사직을 받아들여 좌의정직에서 해임했다. 이후에도 부원군이자 국가 원로로서 조정에 참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유자광과 언관들의 공격도 계속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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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 1478년(성종 9년) 성종은 호학 및 당시의 문운융성과 학문 연구 장려를 위해 연로함과 덕망을 두루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경 왕사로 임명하여 국정을 자문함과 동시에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제안을 하자 그는 정인지를 적극 추천하여 삼로로 선정되게 하였다. 그러나 정인지를 왕사로 추대하기 직전에 대간으로부터 "한미한 가문에서 자수성가하여 기신하였으나 식화에 전념하여 재산을 치부하였으니 존경할만한 인물로는 불가하다."라는 반대가 있었다. 그러자 한명회 등의 대신들은 "정인지의 식화는 장리에 불과하였으니 큰 흠이 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정인지를 왕사로 추대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으나 결국 사림파들의 맹렬한 반대로 정인지는 왕사로 추대되지 못하고 그해 11월 병으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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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후궁 출신 왕비인 폐비 윤씨 폐출 사건(1479.6)에 참여하였는데, 후일 부관참시의 원인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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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1479년(성종 10년) 늦가을 명나라에서 건주위 여진족을 치려고 조선에 후원을 요청하여 어유소에게 군병을 거느리고 참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강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고 폭설이 쌓이어 길은 험하여 결국 지원군을 퇴각시켜 되돌아왔다. 그러나 명나라에 관계된 문제이니 병력을 다시 보내야 된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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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 성종이 다시 군신회의를 소집하자 재상들은 모두 추위와 어려움을 이유로 파병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한명회는 그래도 파병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논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녕만 도모하기 때문이고, 노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대체입니다. 군왕의 적개에도 의당 급히 서둘러야지 늦출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라며 굽히지 않았다. 결국 논의가 계속되다가 그의 뜻이 관철되어 성종은 의정부좌의정 윤필상에게 가서 정벌하라고 명하여 다시 군사를 파병,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성종은 '경의 강한 계책 덕에 거병하여 성공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며 그를 칭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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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 또한 그는 두만강과 압록강에 장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 '조종조에 압록강 연안에 위아래로 장성을 쌓으려고 하다가 일이 커서 이루지 못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다시 그 일을 거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하니, 성종은 의정부좌의정 홍응을 파견하여 성곽의 수축, 개보수를 감독하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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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 == 국가 원로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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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 1480년(성종 10년) 가을에 부원군직을 사임하려 하였으나 성종이 승낙치 아니하고 성종이 어찰을 보내 " 국가의 공적이 여러 세대에 이르고 재주와 식견은 한 세대를 앞서 갈 만큼 밝으며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나라 근심으로 염려하여 논의하면 반드시 적중하였다. 원로가 조정에 있음은 나라의 영광이며,믿는 신하가 힘을 다함은 임금에게 힘과 의지가 되는도다. 아무리 오래도록 병에 시달리더라도 많은 약을 내리니 힘써 치료하여 내 뜻에 부응하라. 그러면 경도 노년에 편안함이 있고 나도 옛 것을 버리고 허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사퇴를 만류하였다. 1483년 경상도에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을 대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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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 그는 은퇴를 결심하고 서울 중심부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만들었다. 한명회는 정자의 이름을 '물새들이 희롱하는 정자'라는 뜻의 압구정이라고 지었다. 압구정동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명회는 자기가 권력이 아닌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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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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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 그는 스스로를 젊어서는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되면 강가에 누워 세상을 관조한다고 자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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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 조정의 문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압구정에 찾아와서 압구정을 예찬한 시가 수백 편이었다. 하지만 이는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이를 비웃었다. 포의 이윤종은 이를 비웃는 시를 짓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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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 그는 자연을 벗 삼겠다 하였으나 시중의 학자들은 권력과 벗 삼았다며 조소하였다. 한강 남쪽에 지은 그의 정자와 별장은 화려하기로도 이름 높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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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 | == 본 문서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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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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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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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AA%85%ED%9A%8C|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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