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편집]
냉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91년까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진 대립 시기를 말한다.
2. 상세[편집]
'냉전'이라는 표현은 버나드 바루크가 1947년에 트루먼 독트린에 관한 논쟁 중 이 말을 써서 유명해졌는데, 이것은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의미의 전쟁인 열전과 다르다. 당시에 냉전 주축 국가의 군대가 직접 서로 충돌한 적은 없었으나, 두 세력은 군사 동맹, 재래식 군대의 전략적 배치, 핵무기, 군비 경쟁, 첩보전, 대리전(proxy war), 선전, 그리고 우주 진출과 같은 기술 개발 경쟁의 양상을 보이며 서로 대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종전을 앞두고 4년간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등의 추축국 세력에 맞서 동맹을 맺고 함께 싸웠으나, 전후 세계 재편성을 놓고 이견을 보였다. 소련은 자국이 점령한 유럽 국가 중 어떤 지역은 일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병합시키고 그 밖의 지역은 위성 국가로 삼아 공산권을 형성하였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 나라는 나중에 바르샤바 조약으로 뭉치게 된다. 한편 미국과 여러 서유럽 국가들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방어 정책을 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만들었다. 본격적인 위기의 시작은 그리스 내전, 소련의 베를린 봉쇄와, 2차대전 승전국이자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던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지지 기반이 약해지고 있던 때부터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 특히 서독이 마셜 플랜의 원조를 받았다. 라틴 아메리카나 동남 아시아 등 세계 다른 지역에서 소련은 공산 혁명 운동을 지원하였는데, 미국과 해당 지역의 동맹 세력은 이에 대항하여 때로 군사적 개입을 감행해서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당시 많은 나라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 중 한 곳에 가입하거나 이 기구들을 지지했으며 비동맹 운동을 결성한 나라도 있었다.
냉전 중에는 긴장이 고조된 때도 있었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도 있었다. 냉전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위기로는 그리스 내전(1946-1949), 베를린 봉쇄(1948-1949), 국공 내전(1946-1949), 한국 전쟁(1950-1953), 1961년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1961-1962), 베트남 전쟁(1955-1975),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989), 1983년 11월 북대서양 조약군의 군사 훈련(에이블 아처 83)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른바 '데탕트'라 하여 정치적인 긴장을 해소하고, 직접적인 군사 공격을 방지하려는 노력도 나타났는데, 핵무기를 통한 상호 확증 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의 위험 때문에 상대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하기는 어려운 탓도 있었다.
1980년대에 미국은 심각하게 경제가 침체된 소련에게 외교, 군사, 경제상의 압력을 가하였다.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정치 개혁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였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은 종식되었고, 러시아가 소련의 막대한 핵무기를 물려받았다. 냉전은 오늘날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대중문화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종전을 앞두고 4년간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등의 추축국 세력에 맞서 동맹을 맺고 함께 싸웠으나, 전후 세계 재편성을 놓고 이견을 보였다. 소련은 자국이 점령한 유럽 국가 중 어떤 지역은 일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병합시키고 그 밖의 지역은 위성 국가로 삼아 공산권을 형성하였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 나라는 나중에 바르샤바 조약으로 뭉치게 된다. 한편 미국과 여러 서유럽 국가들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방어 정책을 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만들었다. 본격적인 위기의 시작은 그리스 내전, 소련의 베를린 봉쇄와, 2차대전 승전국이자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던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지지 기반이 약해지고 있던 때부터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 특히 서독이 마셜 플랜의 원조를 받았다. 라틴 아메리카나 동남 아시아 등 세계 다른 지역에서 소련은 공산 혁명 운동을 지원하였는데, 미국과 해당 지역의 동맹 세력은 이에 대항하여 때로 군사적 개입을 감행해서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당시 많은 나라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 중 한 곳에 가입하거나 이 기구들을 지지했으며 비동맹 운동을 결성한 나라도 있었다.
냉전 중에는 긴장이 고조된 때도 있었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도 있었다. 냉전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위기로는 그리스 내전(1946-1949), 베를린 봉쇄(1948-1949), 국공 내전(1946-1949), 한국 전쟁(1950-1953), 1961년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1961-1962), 베트남 전쟁(1955-1975),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989), 1983년 11월 북대서양 조약군의 군사 훈련(에이블 아처 83)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른바 '데탕트'라 하여 정치적인 긴장을 해소하고, 직접적인 군사 공격을 방지하려는 노력도 나타났는데, 핵무기를 통한 상호 확증 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의 위험 때문에 상대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하기는 어려운 탓도 있었다.
1980년대에 미국은 심각하게 경제가 침체된 소련에게 외교, 군사, 경제상의 압력을 가하였다.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정치 개혁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였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은 종식되었고, 러시아가 소련의 막대한 핵무기를 물려받았다. 냉전은 오늘날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대중문화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3. 배경[편집]
역사가들은 냉전이 언제 시작하였는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냉전의 기원을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로 보는데, 혹자는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 제국, 여타 유럽 국가, 미국 사이에 긴장이 있긴 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발을 뺐으며,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고립되었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이 '적대적인 자본가 무리'에 둘러싸여 있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혁명의 국제화를 주장한 코민테른이 성립하면서 그는 외교야말로 소비에트의 적들을 분열시킬 무기로 보았다.
뒤이어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공산주의의 섬"으로 보았으며, 현재의 소련 주변 자본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 세력으로 대체되리라고 말하였다. 1925년 초 스탈린은 자신이 국제 정치를 양극 세계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 소련은 공산주의로 기우는 나라들을 끌어들이고 있고 자본주의 나라들은 자본주의로 기우는 나라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세계는 "자본주의의 일시적인 안정" 상태에 있으나 결국 이는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소련은 자본주의에 대항하였으며, 1926년에 소련이 영국의 노동자 총파업에 자금을 지원하여 영국과 소련의 관계가 갈라졌고, 1927년에 스탈린은 "자본주의 나라들은...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라며 평화적 공존은 선언하였다. 또 샤흐티 공개 재판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쿠데타를 사주하였다는 공모 진술이 나왔고, 대숙청이 일어나 일련의 정치 억압과 박해로 50여만 명이 넘는 러시아인이 처형당하였으며, 모스크바 공개 재판에서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의 간첩 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1932~1933년의 기근으로 6~8백만여 명이 넘게 죽어 논란이 되었고, 러시아 내전 당시 서방이 백군을 지원하였다. 또 미국은 1933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소련이 독일과 1922년에 라팔로 조약을 맺었다. 이런 사건들로 의심은 커졌으며, 서방 세계와 소비에트 연방은 서로 불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소련과 미국의 관계는 두 나라 지도자에게 장기적인 주요 문제가 되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발을 뺐으며,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고립되었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이 '적대적인 자본가 무리'에 둘러싸여 있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혁명의 국제화를 주장한 코민테른이 성립하면서 그는 외교야말로 소비에트의 적들을 분열시킬 무기로 보았다.
뒤이어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공산주의의 섬"으로 보았으며, 현재의 소련 주변 자본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 세력으로 대체되리라고 말하였다. 1925년 초 스탈린은 자신이 국제 정치를 양극 세계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 소련은 공산주의로 기우는 나라들을 끌어들이고 있고 자본주의 나라들은 자본주의로 기우는 나라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세계는 "자본주의의 일시적인 안정" 상태에 있으나 결국 이는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소련은 자본주의에 대항하였으며, 1926년에 소련이 영국의 노동자 총파업에 자금을 지원하여 영국과 소련의 관계가 갈라졌고, 1927년에 스탈린은 "자본주의 나라들은...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라며 평화적 공존은 선언하였다. 또 샤흐티 공개 재판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쿠데타를 사주하였다는 공모 진술이 나왔고, 대숙청이 일어나 일련의 정치 억압과 박해로 50여만 명이 넘는 러시아인이 처형당하였으며, 모스크바 공개 재판에서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의 간첩 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1932~1933년의 기근으로 6~8백만여 명이 넘게 죽어 논란이 되었고, 러시아 내전 당시 서방이 백군을 지원하였다. 또 미국은 1933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소련이 독일과 1922년에 라팔로 조약을 맺었다. 이런 사건들로 의심은 커졌으며, 서방 세계와 소비에트 연방은 서로 불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소련과 미국의 관계는 두 나라 지도자에게 장기적인 주요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