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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7대 국왕
세조 | 世祖
파일:세조(조선) 사진.jpg
출생
1417년 11월 11일
한성부 충녕대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1468년 10월 2일 (향년 50세)
(사망 557주기)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광릉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6-5)
전주 이씨
재임기간
제23대 영의정부사
1453년 11월 20일 ~ 1455년 8월 3일
조선 진평·함평·진양·수양대군
1428년 7월 28일 ~ 1455년 8월 3일
1455년 8월 3일 ~ 1468년 10월 1일
조선 상왕
1468년 10월 1일 ~ 10월 2일
이름
이유
수지
전호
영창전
봉호
진평대군
함평대군
진양대군
수양대군
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세조
신체
약 175cm ~ 180cm
가족
아버지 세종, 어머니 소헌왕후
배정희왕후
자녀 4남 1녀[1]
1. 개요2. 상세3. 생애4. 사망5. 사상과 신념6. 저서7. 세조가 등장하는 방송8. 평가9. 논란10. 여담11.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세조는 조선제7대 국왕이다.

2. 상세[편집]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인 문종 사후에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하였다. 조선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다.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아 영의정이 되었으며 조카를 압박한 후에야 단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대장경을 구청한 것은 고려 말기부터 인데, 특히 세조는 대장경 구청에 잘 응해 주어 일본에서는 그를 '불심 천자'라고 불렀다.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권신들을 주살하고 정권을 잡았으며, 1455년에 조카 단종 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여 임금이 되었다. 1456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을 잡아 추국한 후 죽이고 그들의 계획을 알고 있음에 고하지 않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킨다. 이에 분개한 생육신은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기도 했다.

탄신일이 태종 17년 9월 29일이라고 알려진 바 있으나 출처 없는 정보이다. 세조실록 참고시 매 9월 24일마다 탄일 하례가 적혀있다. 이에 따라 세조의 음력 생일은 9월 24일이다. 따라서 태종 17년(1417년) 9월 24일 생이다.

3. 생애[편집]

→ 자세한 내용은 세조(조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망[편집]

나병을 앓던 그는 거듭된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정신병적인 망상도 심해졌다. 1467년(세조 13) 5월에 함경도 회령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 백성의 지역감정 등에 편승하여 거병, 단종 폐위 등은 반역이라는 명분으로 거병했다. 그해 7월 조카 귀성군 준과 강순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8월 12일 진압한다. 이어 강순을 파견하여 함길도 너머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그는 무장들을 신뢰하여 귀성군 준, 남이, 강순 등을 측근에 두었는데, 이들에 대한 세조의 총애에, 어떤 이유로 반감을 품은 왕세자는 즉위하자마자 이들을 모두 숙청했다.

한편 훈구 공신들의 발호를 우려하던 그는 만년에 길재, 김숙자 등 정몽주의 문하생들과 김종직 등을 중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종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된다.

말년에는 조카 단종을 내쫓다 못해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하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왕위를 찬탈한 행위가 유교의 시각으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만큼, 세조의 불교 융성 정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했던 세조 나름의 성리학자 견제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22] 그는 자신의 병을 일반적인 역창이나 종기 정도로 여겼지만 그의 병은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나병이었다. 악몽과 불면증, 신경쇠약 등으로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음력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8일에 승하하였다. 바로 9월 10일 명나라에 고부사신 황중·김계박 등을 파견하여, 그해 12월 29일 혜장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당시 나이 향년 52세였다.

능은 경기도 양주의 광릉이다. 후에 정희왕후가 안장될 때 동원이강형의 봉분으로 조성되었다.

묘호는 세조이며 빈청에서 세조의 묘호로 신종, 예종, 성종을 추천했으나, 예종이 '나라를 중흥한 공'을 들어 세조를 제안하였고 이대로 정해졌다. 이는 세종과 문종의 치세를 부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예종은 승천체도라는 시호를 뺀 사실을 신하들에게 추궁했고 공신인 좌의정 박원형은 뜻이 헛된거 같다고 했지만 예종은 듣지 않았다.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이고,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이다.

사후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여러 사찰에도 봉안되었다. 그를 모신 대표적인 신당으로는 1970년대까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복개당이 있다.[23] 이 당제는 조선시대에는 제관이 열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일제 시대에 제관이 5~6명으로 줄었다. 1978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복개당에 보관되오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에 있다.

5. 사상과 신념[편집]

→ 자세한 내용은 세조(조선)/사상과 신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저서[편집]

  • 석보상절
  • 월인석보
  • 역대병요

7. 세조가 등장하는 방송[편집]

7.1. 드라마[편집]

  • 1974년 충의에서 배우 백일섭이 연기했다.
  • 1980년 파천무에서 배우 김흥기가 연기했다.
  • 1984년 설중매에서 배우 남성우가 연기했다.
  • 1990년 파천무에서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다.
  • 1994년 한명회에서 배우 서인석이 연기했다.
  • 1998년 왕과 비에서 배우 임동진이 연기했다.
  • 2007년 왕과 나에서 배우 김병세가 연기했다.
  • 2008년 대왕 세종에서 배우 서준영이 연기했다.
  • 2011년 공주의 남자에서 배우 김영철이 연기했다.
  • 2011년 인수대비에서 배우 김영호가 연기했다.
  • 2016년 장영실에서 배우 고영빈이 연기했다.
  • 2018년 대군-사랑을 그리다에서 배우 주상욱이 연기했다.

7.2. 영화[편집]

  • 1963년 단종애사에서 배우 이예춘이 연기했다.
  • 1970년 세조대왕에서 배우 신영균이 연기했다.
  • 1988년 칠삭둥이의 설중매에서 배우 강신성일이 연기했다.
  • 2013년 관상에서 배우 이정재가 연기했다.
  • 2019년 광대들 : 풍문조작단에서 배우 박희순이 연기했다.

7.3. 연극[편집]

  • 1997년, 태에서 배우 김재건이 연기했다.
  • 2005년 : 길에서 배우 부재호가 연기했다.
  • 2007년 태에서 배우 김재건이 연기했다.
  • 2008년 길에서 배우 이지수가 연기했다.
  • 2012년 전하의 봄에서 배우 강진휘가 연기했다.

8.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로는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이 있다.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또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밖에 호불의 군주였다는 평도 있다. 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부정적 평가로는 계유정난을 명목으로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노산군으로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에 의해 등용된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조가 문종의 사망 이전부터 왕권을 탈취하려 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형인 문종을 독살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문종의 의관 전순의를 시켜 문종의 병을 고의로 악화시켜 빨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이 사망할 경우 큰 벌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의관 전순의는 작은 형벌에 그쳤다가 복권되었다. 수양이 왕이 된 후 일개 의관이 일등공신으로 책봉을 받은 점에서 매우 큰 의혹이 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이 약하다보니 지나치게 공신에 의존하는 정치를 펼쳐 공신들의 무법천지가 이루어지게 된다. 남의 재산을 빼앗고 온갖 횡포를 일삼아도 처벌받는 공신은 없었고 세조가 죽을 때까지 공신 견제에 실패한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홍윤성의 경우 자신의 숙부를 살해하였으므로 세조는 기회를 봐서 그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홍윤성의 노비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투옥시키는 것으로 무마시킨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한 공신들을 대부분 토사구팽하여 죽인 할아버지 조선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내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훈구파 세력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측량 기기 의상을 스스로 제작하기도 해 15세기 과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방과 관련해서 치적도 있지만 실책도 많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9. 논란[편집]

→ 자세한 내용은 세조(조선)/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여담[편집]

  •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 안평대군과 이현로의 집에 있던 글과 작품들이 많았는데, 세조는 이들을 숙청한 후에 괴상한 글과 작품이라는 이유로 모두 불태워 버렸다.
  • 안평대군은 당시 조선 최고의 명필이었다. 고모인 정선공주의 손자 남이와, 동생 임영대군의 아들인 귀성군 준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예종에 의해 예종 즉위 후 남이와 귀성군은 숙청되었다.단종의 죽음을 소재로 한 단종애사를 지은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다시 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세조대왕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 세조는 즉위 전 ‘수양대군’으로 불렸는데,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 모두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정치 감각이 뛰어나 형인 문종이 병약하자 일찍부터 권력 구도를 읽고 세력을 규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공신을 책봉했다. 그런데 훗날 이 공신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일부를 숙청하거나 견제하기도 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면 공신도 예외가 없었다는 점에서 냉정한 군주로 평가된다.
  • 세조는 유교 국가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불교를 적극 후원한 왕이었다. 특히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을 한글로 번역·간행하게 했다. 병을 앓던 중 불경 독송과 기도를 통해 병이 나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 세조는 심한 피부병을 앓았다고 전해지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 온천을 찾았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충주 지역 온천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세조와 관련된 온천 설화가 전국에 남아 있다.
  • 그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경국대전 편찬 사업의 본격화이다. 완성은 아들인 성종 때 이루어졌지만, 세조가 기틀을 마련했다. 강력한 왕권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세조의 능은 경기 남양주에 있는 광릉이다. 광릉은 자연림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능 주변의 벌목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현재는 생태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숲으로 평가받고 있다.

11.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장남 - 의경세자, 장녀 - 의숙공주, 차녀 - 공주, 차남 - 덕원군, 3남 - 예종, 4남 - 창원군, 5남 - 이아지